[세계 지식인 지도] 문화와 예술의 새 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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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전체가 5층으로 이루어져 있는 MIT 미디어 랩 (The Media Lab)(http://www.media.mit.edu)은 그 자체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만들어낸 문화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 랩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현대 기술의 발전보다 15년 정도 더 앞선 생각을 보여주자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생각의 비선형(非線形)적 변화와 발전을 만들어내는 대표 집단인 엔지니어들과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미디어 랩은 1985년 당시 건축공학과 교수였던 니컬러스 네그로폰테(58)와 당시 MIT의 학장인 동시에 케네디 대통령의 과학 자문역을 맡았던 제롬 위즈너 교수의 공동 발의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당시 정보 통신의 급속한 발전과 신문.방송, 나아가 전반적 커뮤니케이션 기술과 문화의 접합이라는 트렌드를 감지하고 이를 연구하는 센터를 MIT 내에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미디어 랩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런 설립 취지는 비단 하드코어의 정보 과학.기술뿐 아니라 인지과학.전자 음악.그래픽 디자인.영상 편집.홀로그램, 그리고 컴퓨터와 사람의 상호 작용에 대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재능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는 기틀이 되었다.

이는 학계뿐 아니라 산업계에도 큰 반향을 일으켜 설립 이래 미디어 랩은 이러한 기본 생각에 동조하는 세계 유수 회사들의 재정적 지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재 미디어 랩에는 30명 가량의 교수 및 시니어 연구원이 있으며, 2백명 가량의 대학원생들이 연구에 동참하고 있다.

미디어 랩의 조직은 연구원의 관심 분야에 의해 자유롭게 형성되고 그 주제에 동조하는 기업 스폰서에 의해 후원되는 다양한 크기의 컨소시엄 및 '시그(SIG, Special Interest Group)' 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조직을 중심으로 한 미디어 랩의 조직도는 옆의 그림과 같다.

상하 지시 체계가 있다기보다는 각 연구원이 열정을 갖는 분야를 자원해 일을 해 나가는 방식으로 조직돼 있는데, 한 연구원은 보통 컨소시엄과 시그에 한개씩 속해 있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미디어 랩의 연구원들은 크게 엔지니어와 예술가의 두 집단으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미디어 랩의 중심에 있는 다양한 발상은 두 집단 모두에 의해 주도되고, 발상만큼이나 중요시되는 실제 동작이나 완성품 구현 또한 이 둘의 협력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특히 예술 분야의 생각은 '디지털 라이프 컨소시엄' 안에 있는 '미래의 오페라 그룹(Opera in the Future Group)' 을 이끌고 있는 토드 마초버, '미학과 계산 그룹(Aesthetics and Computing Group)' 의 존 마에다, 그리고 '인터랙티브 영화 그룹(Interactive Cinema)' 의 글로리아나 데이번포트에 의해 세 개의 큰 축이 형성돼 이루어지고 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에 예술가의 역할이 필수적임을 인식한 네그로폰테에 의해 발탁됐다. 이들의 작품 경향의 공통점은 관객의 예술 참여와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느낌의 형상화 등 이미 오랜 숙제였으나 표현 매체의 제약에 의해 예술가가 의도하는 만큼 표현되지 못했던 주제들을 현재의 기술이 허용하는 한계 내에서 이루어내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마초버 교수에 의해 주도돼 미디어 랩을 유명하게 만든 프로젝트 중 하나로 '브레인 오페라 (Brain Opera)' 라는 것이 있다. 미디어 랩의 상주 예술가(Artist in Residence) 인 동시에 뉴 잉글랜드 음악원의 교수로 잘 알려진 첼리스트 요요마와의 협력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연주자들을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며 브레인 오페라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을 맞이하는 것은 네온 등으로 꾸며진 실내에 가득찬 각종 전자 악기들뿐이다. 전자 키보드.전자 하프.전자 콘트라베이스(hyperinstrument) 등이 스스로를 지탱하며 공간을 메우고 있다. 관객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객 중에 이들 악기를 노련하게 다룰 수 있는 전문가가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오페라를 감상하며 열정과 환희.분노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면 충분하다.

다음에 이들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각각의 악기에 따라 적절히 디자인된, 와이어가 연결되어 있는 '연주복' 을 입고 악기 옆에 자리하는 것이다. 연주복을 입은 관객들은 악기 특성에 따라 팔을 움직이는 등의 간단한 동작을 하면 된다. 다음, 특별히 제작된 '지휘자의 재킷(Conductor's Jacket)' 을 입은 사람이 지휘를 시작하면 전자 악기들은 각각의 하모니를 이루며 연주하기 시작한다.

실제 공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여기까지 각각의 악기는 단지 단조로운 톤으로 악보의 음계를 연주할 뿐이지만, 각각의 악기 옆에 위치한 '연주가' 들의 감흥이 개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연주복에 부착된 각종 센서에 의해 이들의 감정 변화가 읽히고, 이러한 감정의 고조가 악기의 연주에 반영되는 것이다. 이쯤 되면 관객의 참여가 극대화된, 아니 이미 누가 관객이고 누가 공연자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는 연주회라고 할 수 있다.

이 퍼포먼스를 디자인하고 실제로 옮기는 작업은 마초버 교수와 요요마가 주도한 선율의 디자인과 조화의 구현이 필수적이었지만, 로잘린드 피커드 교수 등이 주축이 되어 개발한 감성을 가진 컴퓨터를 만드는 소프트웨어(사람의 감성을 전자 신호로 해석하는 기술), 조 파러디소 교수와 그의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진 각종 전자 센서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데이번포트 교수의 '인터랙티브 영화' 나 마에다 교수의 '숫자를 이용한 디자인(Design by Numbers)' 도 모두 관객의 호흡을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는 거대한 계산기술을 바탕으로, 상호작용적인 동시에 그 인터페이스가 관객에게 어떠한 제한으로 느껴지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는 작품 활동을 추구해 왔다.

이들의 끊임없는 상상과 도전, 그리고 구현은 이들 예술가의 비선형적 사고에 의해 영감을 얻는 엔지니어들의 도움과 이 엔지니어들이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한 예술가들의 만남으로 가능했다.

미디어 랩의 '예술과 표현 그룹' 은 이제 그 중심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 있는 유럽 미디어 랩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새로운 문화와 생각,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갈등이 존재하는 곳에서 또 어떠한 치열한 창작이 이루어지게 될지가 기대된다.

윤송이 매킨지 컨설턴트.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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