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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테러참사 특별기고]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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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의 펜타곤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며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공격의 충격은 한 주일이 지나가도 쉽사리 가라앉지 않고 있다.

너무나 엄청난 참사 앞에 "인간이 이럴 수가 있나" 하며 테러의 반인륜적.반문명적 행위를 계속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분노와 슬픔과 동정은 그 테러의 대상이 우리의 우방인 미국이라는 데서 한층 더 처절한 것이다.

사람은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특히 죽음을 지켜볼 때 누구나 자기에게 가까운 가족과 친구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한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인간적 충동이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미국이 겪고 있는 참변을 지켜보는 한국인의 심정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아니 유일한 동맹국이다. 50년 전 우리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4만 명의 희생자를 내며 함께 싸운 동맹국이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특히 자유사회를 유지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우방이다. 그 미국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대규모의 테러공격을 당한 지금 우리가 받은 충격도 결코 가벼울 수 없다.

*** 美원인제공 시각 무책임

미국에는 1백만을 훨씬 넘어 2백만명에 육박하는 한국교포와 유학생이 살고 있다. 한반도 밖에서 가장 큰 한인사회가 있는 도시는 로스앤젤레스이며 이번 참사의 현장인 뉴욕에도 수십만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20세기로부터 시작해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민족공동체의 중요한 거점인 미국은 한국인에게 전혀 생소하지 않은 이웃이 되고 있다. 그러기에 이번의 테러사태는 이웃집에 들이닥친 재난처럼 우리 국민에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미국이 당한 참변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와 미국이 많은 가치와 목표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운영의 기본 틀을 우리는 함께 지켜가고 있다. 이러한 우리의 자유가 외부로부터 오는 테러공격에 의해 큰 위협에 처한다는 것을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던 한국인으로서는 오늘의 미국인이 당면한 위기감과 당혹감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번 사태의 성격과 원인에 대한 일반론적인 설명들 가운데는 경청할 만한 것도 적지 않다. 넓게는 문명의 충동이나 종교간의 대결로 보아야 한다는 이론도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다.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낳은 극단적 교조주의가 종교적 신념과 합성될 때 자아내는 폭발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지닌 객관성이 근자에 유행하는 반미주의에 오염되면 지극히 편파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도 있다.

이번의 테러공격은 미국의 '힘의 외교' 가 낳은 필연적 귀결이라든가,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가 추진하는 미사일방어(MD)체제가 테러공격의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는 식의 추론은 원인과 결과를 확실히 연결시킬 아무런 근거가 없는 무책임한 발상의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무엇보다 이번의 테러공격이 미국의 부당한 압력을 이겨낼 길이 없는 약자가 부득이하게 취할 수밖에 없는 반격이었다는, 즉 '강요된 선택' 이었다는 식의 설명은 지극히 부적절한 것이다. 한꺼번에 수천, 수만명의 무고한 인간을 폭사시킨 테러는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다.

미국 독립 이후 처음으로 본토 핵심부에서 테러공격을 받아 미증유의 희생을 치른 미국인들이 애국심과 적개심을 함께 불태우며 보복과 응징을 다짐하는 상황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 격앙된 보복 새문제 양산

그러나 격앙된 분위기에서 추진되는 응징공격이 정치적.군사적.도덕적으로 많은 새로운 문제를 양산할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 내와 우방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국이 합리적으로 침착하게 테러에 대한 응징 수순을 밟아가기를 세계는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지성과 합리주의적 전통을 신뢰하고 있다. 자유로운 토론과 합법적 절차를 거쳐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전쟁과 평화에 임하는 미국의 전통이 지금의 비상사태에서도 확고히 유지되리라고 믿는다.

자유언론을 대표하는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신문들이 정론을 전개하는 한 미국이 무책임한 과잉반응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지도자들이 테러와의 전쟁은 단숨에 결판낼 수 없는 장기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테러는 분명 우리 시대의 암적 폭력임에 틀림없다. 모든 국가의 자유와 생존을 위협하는 암적 바이러스인 테러를 제거하는데 미국이 앞장서는 계기가 마련됐다면 이번 참사의 희생에도 일말의 역사적 의의가 부여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은 회원국 모두에 대한 공격이라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결의를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런던.파리.베를린의 시민들은 미국이 겪는 시련의 시간에 자유를 지키겠다는 시민적 연대의식을 새삼 다짐한 것이다.

우리도 그러한 자유연대에 끝까지 참여하려는 것이며 동맹국의 국민으로서 모든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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