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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우리 경제는 우리식으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미국의 테러참사 이후 우리 경제의 미래를 어둡게 보는 견해가 늘고 있다. 경기침체의 먹구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여기던 미국경제의 회복이 지연될 것이란 관측 때문이다.

정부는 금리인하.추경편성 등 경기악화에 대비해 마련한 대안을 서둘러 추진할 의사를 내비치고 있다. 재정적자를 감수하고 좀더 과감한 부양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불확실성 커지는 美 경제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미국이 금리인하.재정확대 등 적극적인 경기대책을 펼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우리 역시 경기부양 쪽으로 거시정책의 가닥을 잡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과연 이런 정책사고가 타당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배우에게 물어봐야 한다. 주연과 조연 중 어느 것이 더 어렵냐고. 최선을 다하는 배우라면 어렵기는 다 마찬가지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때로는 주연의 연기에 맞춰 자신을 조율하는 것이 주인공 노릇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규모야 어떻든 전쟁이 예고된 현 상황에서 미국 경제의 불확실성은 이전보다 커졌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경제정책의 선택은 오히려 확실해졌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전쟁을 계기로 단기 대책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정책 선택이 보다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가장 핵심적인 재정정책의 경우 이전에는 흑자폭의 추이, 세금감면 효과, 세대간 형평성 등 장기적 관점의 고려가 적지 않았으나 지금은 당장의 경기부양에 초점이 주어질 공산이 크다. 금리인하도 이전과 같은 저울질의 부담이 덜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냉정하게 볼 때 경제정책의 환경은 더 불확실해졌고, 경제정책의 선택은 더 어려워졌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주가는 미국의 실물경제를 따라가지만 우리의 주가는 우리의 경제전망에다 미국의 주가변동까지 반영하는 형편이니 시장의 혼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실물분야의 경우 수출 전망은 미국의 내수 추이를 쳐다보면 되지만 우리의 내수를 결정하는 소비와 투자행태는 경제 내부의 구조적 불확실성에 의해 제약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식으로 미국의 거시정책을 흉내내거나 섣부른 증시부양을 펴는 것은 정책의 공회전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

지난해 가을 우리 경제가 식기 시작할 때 전문가의 다수 견해는 효과의 시차가 큰 재정정책보다 금리인하를 통해 경기조절을 하자는 것이었다. 미국 경제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많이 듣던 얘기다.

세금인하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는데 놀랍게도 그 근거로 미국의 감세정책을 들고 나왔다. 당시는 구조조정의 지연, 추가 공적자금 공방 등으로 자금시장의 경색이 본격화하고 경제의 불확실성이 급속히 확산되던 시기였다.

금리인하로 설비투자를 늘릴 기업과 세금이 몇 푼 준다고 자동차를 바꿀 소비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전통적인 가격유인 정책으로 가계나 기업의 행동을 바꾸는 데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공적자금과 사회보험의 재정부담을 우려해야 하는 우리와 재정흑자의 처분방식으로 감세를 택한 미국을 비교하는 아찔함은 접어두고 하는 말이다.

***단기 재정정책 등은 한계

일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경제환경이 얼마나 변했는지 궁금하다. 부실 대기업을 편법으로 연명시키며 시간만 끄는 기업구조조정, 지주회사와 은행합병의 장막 뒤로 사라진 금융구조조정, 공적자금의 재정압박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2003년 균형예산이라는 단기 목표에만 집착하는 재정정책, 부채와 출자제한 등 사업선택의 영역마저 규제로 틀어막는 기업정책 등 예전과 달라진 부분이 많지 않다.

경제에 있어 파괴는 창조의 시작이다. 미국경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전환점을 찾을 수도 있다. 우리도 위기를 기회로 돌릴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정상적인 경기순환 과정을 밟고 있는 미국경제의 배역을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적절한 경기부양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조정과 규제개혁의 청사진 위에다 거시정책의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주연보다 빛나는 조연이 되려면 몇 갑절 더 노력해야 하는 법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 ·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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