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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불 이우환 화백 '세계 문화상' 받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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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예술계의 노벨상으로도 일컬어지는 제13회 세계문화상(Praemium Imperiale) 회화 부문 수상자로 일본과 유럽에서 활동 중인 이우환(李禹煥.65)화백이 선정됐다. 한국인이 이 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미술협회가 주관하는 세계문화상은 매년 회화와 조각, 건축, 음악, 무대.영상 등 5개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남기고 국제 예술 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가들에게 수여하고 있다.

일본미술협회는 "李화백의 회화 작품이 동.서양의 심오한 철학적 바탕 위에서 막다른 길에 몰린 20세기 서양 미술에 탈출구를 제시했다" 고 수상 사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다음달 25일 도쿄에서 열리며 1천5백만엔(약 1억5천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프랑스 파리의 아틀리에에서 李화백을 만났다.

"캔버스에 붓을 대기가 두렵다. " 그는 현대 회화가 직면한 딜레마를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사진과 비디오는 말할 것도 없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기상천외한 영상을 구현하는 마당에 눈앞의 세상을 화폭에 그대로 옮기는 작업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캔버스를 칼로 찢거나 불태우는 등 예술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시도들이 많이 나타났다. "

이처럼 막다른 길에 몰린 현대 회화에 탈출구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 李화백에 대한 구미 미술계의 평가다.

그의 작품 철학은 자기 개입을 가능한 자제하고 외부세계를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 (이는 60년대 후반부터 그가 주창.선도한 모노파(物派) 미술운동의 이념이기도 하다. 주관을 억제하고 타인과의 대화, 외부와의 관계성을 추구하는 모노파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유형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

"어떠한 추상도 이념일 수밖에 없다. 이념으로 캔버스를 가득 메우는 것은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다. 결코 열린 지혜가 아니다. " 한마디로 "캔버스(외부 세계)도 생각이 있고 입장이 있다" 는 얘기다.

70년대 모노파를 주도할 당시 점과 선의 연속이던 그의 캔버스는 이제 단 한두개의 점으로 채워질 뿐이다. 배경색을 특별 주문해 만든 캔버스의 나머지 부분은 점(인위적인 개입)과 대화하는 여백(외부 세계)이다.

"인간의 시각은 본능적으로 대상의 중심으로 모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내 작품에서 점은 항상 중심을 벗어나 있다. 점과 중심 사이에 눈길을 더듬는 과정에서 시각의 떨림이 생겨난다. 그것이 내가 시도하는 내부와 외부, 관여된 것과 관여되지 않은 것의 만남이다. "

일방적인 이념으로 외부 세계를 덮어버리는 게 아니라 "바깥과의 상호 교류가 이뤄져야 작품의 비약성과 초월성이 보장된다" 는 믿음이다.

그가 넓은 붓으로 길이 20㎝ 정도의 점 하나를 내려 긋는데는 7~8분이 걸린다. 이 작업을 하루에 2~3개쯤 하고 나면 탈진 상태에 빠진다. 극도의 정신 집중이 필요한 탓이다. 그래서 내년에는 작품 제작과 개인전 등 활동을 조금 줄일 생각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문외한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해볼 생각은 없느냐" 는 질문을 던졌더니 그는 벌컥 화를 냈다. "현대 미술은 관념화된 것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풍속이고 현대 미술은 하나의 시도일 수밖에 없다. "

97년 파리 국립 주드폼 미술관에서 한국작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한 그는 지난 4월에는 호암(湖巖)재단의 호암상 예술상 분야를 받는 등 큼직한 상을 잇따라 받고 있다.

파리=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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