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미국 정보망… 구겨진 자존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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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첨단 장비와 정보망으로 무장한 미국의 자존심이 테러 공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우주 방어까지 공언한 미국이지만 자국 영토, 그것도 국방과 경제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비정규전에 대비한 정보 수집과 억지(抑止)능력에 커다란 허점을 드러낸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안보 관계자들 사이에선 미사일방어(MD)구축에 치중한 나머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인식돼온 안보 전략의 우선순위를 테러 억지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 왜 뚫렸나=가장 큰 이유는 정보 부재 때문이다.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이번 사건으로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 있다.

전쟁급 테러를 기획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때까지 아무런 정보도 감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테러 전문가인 윌리엄 가트리지 애스턴대 명예교수는 "테러 방지엔 초기단계의 정보 입수가 가장 중요하다" 며 미 정보기관의 '방심' 을 지적했다.

한명의 스파이가 1개 대대보다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첩보원들의 철칙을 미 정보당국이 등한시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근 아랍국가들의 반미 감정이 최고조에 달한 데다 오사마 빈 라덴이 대규모 살상 테러를 공언한 상황이어서 미국 본토에서의 테러는 사전에 예상할 수 있었는데 미 정보당국이 이를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 당국은 최근 해외 공관과 여행객을 대상으로 "테러 정보가 있으니 주의하라" 고 경고했지만 정작 안방은 무방비로 테러범들에게 열어두고 있었다. 한꺼번에 세곳의 공항에서 무기를 소지한 복수의 테러범이 공항검색대를 통과하도록 방치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또 납치된 미국의 민간 여객기들이 '무기' 로 사용되는 동안 아무런 경보와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는 점도 미국의 방공.관제망의 문제를 노출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중앙정보국(CIA)과 연방수사국(FBI)의 인력과 예산을 감축한 데 대해서도 비판이 일고 있다.

◇ 국방 전략 변경 불가피=이번 테러 사건은 막바지 단계에 접어든 부시 행정부의 국방전략 개혁 작업에도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테러야말로 탈냉전기 미국이 직면한 최대의 위협" 이라고 주장해온 전략가들의 주장이 현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부시 행정부도 신국방 전략을 짜면서 테러 억지를 주요 전략 과제의 하나로 상정해 두고 있다. 지난 5월엔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 주도로 "부처별로 분산된 테러 대책을 총괄하는 연방 기구를 창설키로 했다" 고 발표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소련을 억지하는 데 주력하던 시대에서 새로운 위협과 맞싸우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면서 구체적으로 ▶생화학 무기 공격을 포함하는 테러리즘▶사이버 공격▶불량 국가들의 미사일 위협을 예로 들었다. 윈윈 전략을 포기하고 '플러스 원' 전략을 수립한 것도 이같은 안보 상황의 변화를 감안한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새로운 위협' 가운데 특히 미사일 위협을 미국 안보의 최대 위협요소로 간주하고 MD에 전력을 기울여 왔다. 이같은 MD 우선 정책 때문에 테러 등 비정규전 대책이 뒤로 밀려났다는 비판이 이번 사건 발생 이전부터 제기돼 왔다.

민주당 소속의 조셉 바이든 상원 외교위원장과 같은 MD 신중론자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불량국가의 미사일 위협에 대비한 MD 구축보다 반미집단에 의한 국제테러 예방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고 촉구해 왔다.

하지만 이번 테러 사건이 오히려 MD 구축의 명분을 강화해 줄 것이란 분석도 있다. 공화당의 강경파들은 "이번 사건에서 보듯 반미 테러집단이나 불량국가들이 또 어떤 예상 밖의 행동을 감행할지 모른다" 고 주장하며 이들의 미사일 도발에 대비한 MD 배치 계획을 앞당기자고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예영준 기자

<특별취재반>

워싱턴=김진.김종수 특파원, 워싱턴지사=박성균 기자, 뉴욕=신중돈 특파원, 홍주연.박종근 기자, 뉴욕지사=이준환.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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