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 문학상 후보작] 김명인 '부석사' 外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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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김명인씨는 감정의 북받침을 그대로 토로하는 시인이 아니라 세심하게 시어를 선정하고 조직하여 하나의 작품을 엮어가는 시인이다.

천부적 재능의 시인이라기보다는 절차탁마에 의한 제작형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정시가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운율의 상투성을 깨뜨리고, 마치 산문의 한 구절을 엇갈려 놓은 듯한 형태로 시행을 배치한다.

이러한 시작법은 풍부한 의미의 충돌과 그것을 통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개성적 비유와 정밀한 묘사의 정신이 결합하면서 삶의 표층과 이면을 하나의 화폭 안에 잔상(殘像)처럼 펼쳐낸다.

이러한 표현미학을 통하여 쓸쓸하고 우울한 생의 단면들도 아름답고 신비로운 음영으로 전환된다. 이 미묘하고 아름다운 음영을 통하여 우리는 한 영혼이 걸어간 길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삶의 빛나는 표면보다 그 속에 감추어진 상처에 관심을 보인다.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상처는 감추는 법인데, 그는 외롭고 쓰라린 소년기의 체험에서부터 가족사의 고난에 힘겨워하는 현재의 상황까지 숨김없이 시로 드러낸다. 그것은 세상의 상처를 통해 삶의 진실을 찾아내려는 그의 시작 태도 때문이다.

그의 초기시는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표상되는 고통스러운 체험을 중심으로 시인의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드러내는 데 주력했다. 세번째 시집 『물 건너는 사람』에 오면 그러한 주관적 심정이 내면화되면서 막막한 세상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내려는 사색과 응시의 자세가 나타난다. 이러한 시적 자아의 태도는 지금까지 거의 변함없이 지속된다.

그는 막막하고 어두운 생의 지평을 넘어서려 하면서도 결국은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사슬에 힘겨워하며, 유적과도 같고 몽유와도 같은 현실 속을 끝없이 헤맨다. 때로는 삶의 덧없음에 몸서리치다가도 그 덧없음을 넘어 생의 한 지평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자질구레한 삶의 닻을 다 거두어들이고 시간의 흐름조차 지워버린 채 몽상의 세계로 떠돌 수는 없을까 꿈꾼다. 그 꿈은 물론 꿈만으로 끝난다.

그러나 그 몽유의 흔적은, 사원에 내장되어 있는 낡은 경전처럼, 혹은 순례자의 고통을 담은 유적처럼, 뒤에 오는 고행승들에게 반려와 이정표의 역할을 해준다. 요컨대 그의 시는 고통과 상처를 노래함으로써 역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독특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의 최근의 시작업은 생의 모순에 대한 관심으로 집중된다. 그리고 그 모순은 그의 성장 공간이자 의식의 거주 공간인 바다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바다는 어디론가 나아가고자 하는 탈출에의 충동을 환기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막막한 유폐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바다는 생의 가능성과 단절이라는 이중적 모순성을 함축한 상징이다.

끊임없이 망설이고 동요하면서 생의 지평을 찾아 출렁거리던 바다의 형상이 최근 시에서 죽음과 관련된 생의 인식으로 전환된 것은 새로운 국면이다. '부석사' ( '문학사상' 2001년 5월호), '구름 속으로의 이장' ( '작가세계' 2000년 겨울호) 등의 시에 보이는 허공을 떠도는 함박눈이라든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볍게 몸을 옮기는 구름의 이미지는 그의 의식이 정체와 침강(沈降)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떠돎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기미를 담고 있어 주목된다. 이것은 생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다시 그것을 은은하게 감싸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다.

이숭원 <문학평론가.서울여대 교수>

◇ 김명인 약력

▶ 1946년 경북 울진 출생

▶ 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 시집 『동두천』『바닷가의 장례』『길의 침묵』등

▶ 소월시문학상.동서문학상.현대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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