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클린턴·미국언론 '가깝고도 먼 8년' 분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과 언론과의 사이는 어땠을까.미국의 전국적인 매체감시 단체인 FAIR(Fairness & Accuracy In Reporting)의 인터넷매체 칼럼에서 유명 언론비평가 노먼 솔로몬은 클린턴과 언론은 애증의 관계였음을 시사했다.

솔로먼은 특히 클린턴이 케네디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경제문제 처리와 르윈스키 스캔들에 이르기까지 미국 언론과 치른 전쟁(Media Wars)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눈길을 끌었다.

클린턴은 1992년 민주당 대통령후보 전당대회 때 그의 경력에 대한 언론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 중 학창시절 백악관의 로즈가든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한 장면은 언론의 단골 메뉴였다.

그해 말 타임지는 이 장면과 관련한 기사를 계속 크게 다뤘다. 대서특필할 때는 "전당대회 영상 화면에서 가장 잊지 못할 장면은 바로 케네디에게 감명받아 고무된 학생 클린턴의 모습이었다" 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동성애자의 군입대 권리를 주장했다가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언론과 맞서 싸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침묵을 지켰다.

클린턴이 언론의 지지를 받은 것은 경제 쪽이었다. 그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세계무역기구(WTO)를 위해 격렬한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의 주가는 올라갔고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시장경제를 지지하면서)그를 무시한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언론도 인색하나마 그의 업적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문선명(文鮮明)통일교 교주와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에게 냉대를 받으면서 이들이 각각 사주로 있는 워싱턴 타임스와 폭스 뉴스의 보수적 입장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가 국방부를 빼곤 작은 정부를 지향하자 언론에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복지 개혁안에 서명을 하자 언론은 다소 불만을 표시했다.

그가 공화당 소속이었다면 일부 진보성향의 언론은 공세에 나섰겠지만 약간의 비판을 하고 넘어가는 데 그쳤다.

클린턴은 96년 통신법 개정으로 미디어업계 거물들의 호감을 샀다. (방송사의 소유제한 상한선을 확대한) 이 법으로 방송사들은 수십억달러(약 수조원)의 선물을 받은 셈이 됐다.

대통령 취임 몇달 만에 단행된 이라크 정부청사에 대한 미사일 공격은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미국 언론인들은 바그다드 민간인들의 사망에 개의치 않고 그의 계속된 미사일 사용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르윈스키 스캔들로 꽤 시달려야 했다. 정치적 문제로 번진 이 사건에 언론은 집요하게 매달렸고 많은 언론인들도 기사거리를 찾느라 바빴다.

솔로몬은 "클린턴이 사회적.경제적 정의에 눈을 돌리지 않았으나 그의 재임 중 미 국민들의 수입이 늘어나면서 이런 문제는 간과됐다" 고 지적했다.

김기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