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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서울 거쳐 평양으로 (76) 국군에 처음 온 미군 전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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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조지 패튼(1885~1945)

윌리엄 헤닉 대령의 생각은 이랬다. 조지 패튼이 전차전의 명장이 된 이유는 보병과 포병, 공군과의 합동작전을 원활하게 구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패튼은 늘 돌격의 선봉에 서 있었다는 설명이다. 쉽게 말하자면 ‘패튼식 전법’을 구사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뜻을 충분히 이해했지만, 내게는 전차가 없었다. 미군에게 탱크를 지원받는 것은 몹시 어렵다.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했지만 보병과 긴밀한 협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전차 작전은 어렵다. 적의 보병에게 저격 당하기 쉽고, 적진에서 고립돼 파괴될 수도 있다. 보병이 밀착해서 전차의 앞과 뒤를 받쳐주지 못한다면 전차 작전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헤닉은 “군단장에게 한번 지원을 요청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헤닉은 프랭크 밀번 군단장이 우리 1사단에 보였던 신뢰와 그로부터 나오는 후의(厚意)를 거론했다. 그는 더 나아가 “탱크 지원이 이뤄진다면 우리 고사포단에 있는 차량 150여 대를 동원해 보병과 포병을 교차해서 운반하는 ‘셔틀(shuttle)식 전진’으로 진격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밀번 군단장에게 평양 진격을 위해 작전계획까지 변경하도록 한 사람이 나다. 게다가 또 전차를 부탁한다면 내 입장이 참 궁색해 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눈치나 예절을 따지고 있기에는 내 처지가 그리 편치 않았다. 밀번 군단장은 연배를 따지자면 내 부친 같은 사람이다. 인자하면서 믿는 부하에게는 전폭적인 신뢰를 주는 인물이다. 그 점을 믿어보기로 했다.

나는 전화로 밀번 군단장을 찾았다. “진격하는 데 전차가 반드시 필요하니 지원 좀 해 달라”고 했다. 밀번 군단장은 “잠시 뒤에 대답을 주겠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초조하게 기다렸다. 30분쯤 지나서 밀번 군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차 1개 중대를 보내주겠다”는 회신이었다. 길고 긴 가뭄 끝에 만난 단비처럼 눈물겹도록 반갑던 대답이었다. 밀번은 그렇게 다시 한번 나에게 믿음의 덕목을 보여줬다. 나는 그에 부응하기 위해 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우리 사단에는 조그만 ‘사건’이 벌어졌다. 6월 25일 전쟁이 터진 뒤 임진강에서 부대를 따라 함께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의 적 치하(治下)에 남아 있던 1사단 소속 장병 100여 명이 부대 합류를 위해 찾아온 것이다. 전쟁 중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합류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 치하에서 이들은 무엇을 하면서 남아 있었을까. 그리고 군인의 사명은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본대에 합류해야 한다. 이 두 가지의 문제점이 불거졌다.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한 뒤인 1950년 10월 초순부터 북진을 거듭했다. 국군 장병이 그해 10월 초 미군 전차 위에 올라타고 평양 진격에 나서고 있는 모습이다. [중앙포토]

사단 참모들과 회의를 했다. 격론이 오갔다. 일부 참모는 “이들은 적과 협력해 목숨을 부지했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며 강한 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일부는 “그래도 지금은 이들을 받아들여 함께 작전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고성을 지르며 감정이 격해지기도 했다. 나는 이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다. 내가 정리에 나섰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엄청난 국난 을 겪고 있는 상태다. 부대원들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서로를 탓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를 모두 이 임진강 강물에 떠나 보내자. 그리고 다시 우리가 단결을 해야 한다. 지금은 적의 수도를 공격하는 데 힘을 모으자. 지난 일은 모두 불문에 부치겠다.”

그리고 이들을 각 부대에 재배치했다. 이들 대부분은 그 뒤 큰 활약을 벌인다. 과거보다 더 열심히 근무하는 자세를 보였다. 그중에는 후일 요직에 오른 사람도 있다. 대승(大乘)의 자세에서 과거의 허물을 감싸 안았던 그때의 내 판단은 옳았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다음 날 아침이다. 미군 M-26 전차 20여 대가 굉음을 울리며 사단에 도착했다. 이를 지켜보던 장병의 사기가 크게 오르고 있었다. 군단 소속 제6 전차대대 C중대였다. 내 지휘 아래에 탱크 부대를 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치하고 다뤄야 할까. 흥분 속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헤닉 대령이 다시 권했다. 그는 “이럴 때 사단장이 선두 전차에 탑승해 진두지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두 전차 위에 올라타서 용맹함과 함께 지휘관의 의지를 과시하고, 나아가 언어 등의 장벽이 있는 국군과 미군의 작전을 앞장서서 조율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우선 훈련이 필요했다. 탱크가 중요하고 강력한 무기라는 점만 알았지 함께 작전을 펼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나를 비롯한 우리 사단 전부는 문외한(門外漢)이었다.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내가 통역을 했다. 12연대 1개 대대를 차출해 고랑포 부근에서 훈련을 했다. 내가 일일이 그 뒤를 따르며 두 시간 정도 통역을 하다 보니 금세 목이 쉬었다. 영어에 능통한 작전처 보좌관 박진석 소령을 내세웠다. 그렇게 반나절을 훈련하니 오후부터는 우리 장병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한국인은 뭔가를 배우는 데는 소질이 분명히 있나 보다. 12연대 장병과 미군 탱크는 곧 한 몸이 돼가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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