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25시] 발빼는 한국인 합사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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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제의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있는 일본 극우사상의 중심지인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합사(合祀)돼 있는 전몰자는 2백46만여명에 이른다.

그들은 19세기 중반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태평양전쟁까지 일본이 치른 11개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이지만 태평양전쟁 전몰자가 전체의 87%인 2백13만여명으로 대다수를 차지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파문' 을 취재하면서 궁금했던 점은 야스쿠니가 이렇게 많은 태평양전쟁 전몰자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구해 합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일제시대에는 야스쿠니가 국영신사여서 정부의 직접 도움을 받아 전몰자 명단을 확보했겠지만 태평양전쟁 후에는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1947년 민간 종교단체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그 답이 최근 드러났다. 사민당 소속 오와키 마사코(大脇雅子)의원이 참의원에서 한 질문에 대해 후생노동성이 밝힌 답변에서다.

후생노동성의 전신인 후생성이 야스쿠니 신사측에 모든 자료를 제공한 것이다.

도쿄(東京)신문은 "후생성이 1987년 3월까지는 전몰자 이름.소속부대 등 합사에 필수적인 자료를 야스쿠니에 전달해오다 특정 종교단체에 대한 편의제공은 헌법의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에 따라 90년 7월까지 일제 군인 인사자료.유족 현주소 등을 열람형식으로 제공했다" 고 밝혔다.

후생성의 전폭 지원 덕분에 오늘날의 야스쿠니 신사가 있게 된 것이다. 신사측은 "사실상 모든 전몰자 합사가 끝났다" 고 밝혔다.

결국 태평양전쟁 때 강제 징병돼 숨진 한국인 2만1천명과 대만인 2만7천명이 유족들도 모르는 사이에 멋대로 야스쿠니에 합사된 것도 후생성 때문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한국인을 야스쿠니에서 분사(分祀)해달라는 유족.한국정부의 요청에 대해 무성의로 일관하고 있다. 정교분리여서 신사 업무에 관여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말 이율배반적이란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

그리고 역사를 왜곡한 '우익역사교과서 파문' 에서도 실감했지만 은근슬쩍 우익세력을 지원하는 일본 정부의 행태를 다시 보면서 많은 걱정이 든다.

일본 정부의 이런 행동이 반복되는 한 한국.중국.일본간의 신뢰는 더욱 추락하고 갈등이 증폭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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