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씨 '150억 수뢰' 무죄 취지로 원심 파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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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대법원 2부(주심 유지담 대법관)는 12일 현대그룹에서 대북사업 협조 대가로 150억원을 받은 혐의(뇌물) 등으로 구속 기소된 박지원(62.사진)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12년에 추징금 148억5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150억원 뇌물 수수' 부분에 대해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 전 실장에게 직접 150억원어치의 양도성예금증서(CD)를 전달했다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신뢰성이 떨어지는 이 전 회장의 진술만을 갖고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 전 회장에게 150억원을 전달하라고 지시한 정몽헌 전 현대아산 회장은 이미 사망한 데다 박 전 실장이 이 전 회장에게서 돈을 직접 받았다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특히 " 이 전 회장이 박 전 실장을 만났다는 시간 등에 관해 진술에 일관성이 없고, CD를 전달하기 위해 직접 차를 운전해 호텔로 찾아갔다는 부분 등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150억원을 관리해 온 김영완씨가 그의 변호사를 외국 호텔로 불러 작성한 두 차례의 진술서는 그 작성 경위와 방법이 비정상적이고 내용도 의심스럽다"며 "이를 증거로 인정한 원심은 법리를 오해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박 전 실장이 SK그룹에서 7000만원을 불법으로 받은 혐의와 대북 송금 과정에서 직권을 남용한 혐의 등에 대해선 원심대로 모두 유죄를 인정했다.

대검 중수부는 "이익치씨 진술의 신빙성을 높일 수 있도록 자료를 보완해 파기 환송심 재판부의 심증을 확실히 하도록 하겠다"며 "검찰은 박지원씨가 150억원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박 전 실장은 2000년 4월 중순 서울 P호텔 내 주점에서 이 전 회장에게서 1억원짜리 CD 150장을 받은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그는 지난해 6월 대북 송금 특검 수사 때 구속돼 1년5개월 가까이 수감생활을 해왔고, 지병인 녹내장이 악화돼 올 들어 네 차례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기도 했다. 박 전 실장은 이날 오후 법원에 보석 신청서를 냈다.

하재식 기자

[향후전망] 서울고법서 다시 재판…대검 "증거 보완할 것"

박 전 실장의 구속 기간이 다음달 15일 끝남에 따라 파기 환송심 재판부인 서울고법이 석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박 전 실장에 대한 구속 기간이 만료되더라도 관련 법규에 근거, 구속 기간(2개월)을 두 차례 연장 할 수 있다. 다만 대법원이 피고인의 주요 범죄 사실에 대해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한 경우 하급심 법원은 보석 등을 통해 피고인을 석방한 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대법원이 박 전 실장의 뇌물 수수혐의에 대해 무죄 취지를 밝혔다고 해서 재항소심 재판부가 반드시 무죄를 선고할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일
반적으로 하급심 재판부는 대법원의 판결 취지를 존중한다. 하지만 검찰이 박 전 실장의 유죄를 입증할 수 있는 추가 자료를 제출하고, 재항소심 재판부가 이를 인정하면 다시 유죄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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