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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산 물은물(57)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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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57. 성철스님의 아버지

성철스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러나 한 인물을 얘기하면서 그 부모에 대한 얘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성철스님과 가까운 분들에게 조금씩 들은 가족 얘기를 자세하지는 않더라도 언급하고 지나고자 한다.

성철스님의 아버지 이름은 이상언(李尙彦), 자(字)는 사문(士文), 아호는 율은(栗隱), 관향(貫鄕)은 합천(陜川)이다. 조선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81년 동짓달 초하루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대로 살던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곳에서 살았다. 진양(晋陽) 강(姜)씨 부인을 아내로 맞아 슬하게 4남3녀를 두었는데, 성철스님은 장남이다.

부친은 평생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성정이 당당하고 직설적이었다. 외모는 성철스님 보다 더 훤해 지팡이를 짚고 삿갓을 쓰고 길에 나서면 선풍도골(仙風道骨.신선이나 도인과 같은 풍모)의 모습이었다고도 하고, 유림으로 향교에 가 좌정하면 향교가 다 훤할 정도였다고도 한다.

어쨌든 성철스님의 기골이 장대하면서도 시원스런 외모는 이런 부친을 많이 닮았던 듯하다. 성철스님이 부친과 관련돼 들려준 일화에 따르면 무서우면서도 자상한 면이 많았던 분이다.

"우리 집에 밤나무가 마이 있었거든. 그라이 온 동네 아이들이 우리집에 밤 훔치러 오는 게 일이라. 몰래 밤나무에 올라가 밤을 따가는데, 선친은 보고도 아무 말을 안해. 가만 보다가 아이들이 나무에서 다 내려오면 그때 호통을 치는 기라. 나무 위에 있을 때 뭐라고 하면 아이들이 나무에서 떨어져 다칠까봐 그런 거 아이가. "

부친은 매우 주도면밀하고 세심한 분이기도 했다. 집 우물가에 구기자 나무를 심어 놓고 매일 새벽 일어나 남보다 먼저 샘물을 떠마셨다고 한다. 우물가 구기자 뿌리가 땅 속 깊이 들어가 우물을 감싸면서 구기자의 좋은 성분이 물에 녹아들게 되는데, 그 물을 새벽 일찍 마시면 장수한다는 옛말에 따른 것이다.

고집스런 면모는 일제하 창씨개명을 거부한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일제 관리들이 그토록 종용해도 꿈쩍도 않았다고 한다. 일제말 전쟁에 필요하다며 집에 있는 놋그릇 등을 모조리 거두어 가져갈 때도 끝까지 거부, 숟가락 하나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후 좌우대립이 극심한 와중에도 완고한 성격 그대로였다고 한다. 지리산 자락이라 공산주의 빨치산들이 자주 출몰했고, 성철스님의 집은 지주 집안이라 당연히 질시와 감시의 대상이었다. 하루는 인민군 병사가 집안에 들이닥쳐 소를 몰고가려던 참이었다. 성철스님의 부친이 이를 보고 호통을 쳤다.

"니는 소 도적질하는 놈 아이가. 니가 백성 위한다는 인민군이가. "

전해오는 말투나 행동이 영락 없는 성철스님이다. 그 인민군이 가만 있을 리가 없다. 부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는데, 동네 사람 누군가가 재빠르게 끼어들어 노인을 업고 도망쳤다고 한다.

이런 완고한 유학자인 아버지가 장남의 출가를 보는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특히 산청 지역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유풍(遺風)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곳으로 매우 보수적인 유교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다.

또 당시만 해도 조선조의 오랜 전통과 정책에 따라 스님이 천민(賤民)취급을 받던 시절이다. 그러니 성철스님의 출가는 온 집안, 아니 온 마을을 발칵 뒤집어 놓은 대사건이었다고 한다.

동료 유학자들이 "아들이 중이 된 가문과는 친교를 가질 수 없다" 며 외면할 정도였다니 완고하고 자존심 강한 부친의 낙담은 이루 다 말하기 힘들 정도였을 것이다. 부친은 그런 분하고 답답한 마음에서 어느 날 하인들에게 집 앞 경호강을 가로지르는 그물을 치라고 지시했다.

"내 아들이 석가모니의 제자가 됐응께, 나는 석가모니한테 복수하는 수밖에 없다 아이가. "

부친은 살생을 금지했던 석가모니에게 복수한다는 차원에서 대규모 살생을 계획한 것이다. 하인들이 잡아오는 고기를 큰 통에 담아놓고 한동안 매운탕만 끓여 거의 매 끼니를 먹다시피 했다.

이때 몰래 물고기를 물동이에 담아 강물에 풀어준 사람은 어머니 강상봉(姜相鳳)이었다. 아버지 이상의 슬픔을 감추고, 아버지의 성격에 맞춰 살아가야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더 찢어지는 듯했다고 한다.

원택 <성철스님 상좌>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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