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고이즈미의 '참배 흥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총리가 15일 야스쿠니(靖國)신사에 가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13일 전격적으로 참배했다.

고이즈미가 15일 참배할 경우 한국.중국과의 외교관계 악화 등을 우려했던 일본내 많은 사람들은 안도한 반면 우익세력들은 안타까워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고이즈미에겐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다는 게 중론이다.

고이즈미는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전 총리가 공식 참배한 이후 처음으로 종전기념일과 관련해 신사를 참배하는 첫 총리가 됐다.

날짜가 15일은 아니지만 13일 '총리대신' 명의의 꽃을 야스쿠니 신사에 봉양한 후 참배해 '총리로서 참배한다' 는 것을 과시했다.

부족한 감이 있어도 '총리' 참배를 한 것이 돼 일본내 우익에게 나카소네 이후 16년 만에 큰 기쁨을 안겨준 점도 얻은 것이다.

지난 4월 이후 '신사 파문' 의 진행과정에서 크게 눈여겨 보게 된 것은 고이즈미의 절묘한 '떼쓰기식' 전략이다.

마치 물건을 사면서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한 후 조금씩 양보하는 척하면서 결국 처음보다 비싸긴 해도 여전히 싼 값으로 물건을 손에 넣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고이즈미가 지난 4월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당선되면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 참배하겠다" 고 말했을 때만 해도 이 문제의 본질은 날짜가 아니라 참배 그 자체였다.

그러나 고이즈미가 계속 고집을 피우면서 어느새 문제의 본질은 '날짜' 로 바뀌었다. 총리 참배에 반대해 온 공명당조차 "다른 날이면 괜찮다" 는 식으로 양보했다.

중국도 '개인 참배' 등의 조건을 붙이기는 했지만 결국 "15일 만은 안된다" 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 결과 '15일만 피해 참배하면 문제 없다' 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고이즈미는 못이기는 척 13일 참배를 했다. 그림을 크게 보면 짜여진 각본에 따라 일이 진행된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이 각본이 그대로 받아들여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내년부터는 고이즈미가 15일을 제외한 어느 날이든 참배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참배의 날짜가 아니라 참배 자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오대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