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구 칼럼] ‘아시아의 세기’ 기다리며 중국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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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아시아의 위치가 세계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있어 이처럼 중요한 시점에 과연 우리 아시아인들은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인가. 과거사에서 비롯된 앙금이나 적대감, 근대화의 후발지역이 지닐 수 있는 열등감이나 반사적 우월감을 자제하고 인류가 평화와 번영을 함께 나누는 이웃을 만드는 데 앞장서는 동양의 지혜와 도량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지구촌이 하나의 이웃이 돼 가고 있는 21세기 초에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긴박한 공동의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 세계경제를 침체로 몰아넣은 금융위기를 극복하면서 국제정치 및 경제를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작업이다. 둘째, 인류의 안전과 복지를 위협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환경, 그리고 에너지 문제에 대한 공동의 대처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셋째, 인류를 파멸시킬 수 있는 핵무기의 감축 및 폐기를 통한 핵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지구촌의 운명을 좌우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제들을 풀어가는 데 있어 아시아, 특히 중국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날로 분명해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출범한 국제통화기금(IMF) 중심의 브레턴 우즈 체제와 이의 운영방향을 조율해온 G7 협의체의 시급한 개혁과 보완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출범한 G20의 성공도 중국의 적극적 참여를 전제하고 있다. 한편 지난해 말 코펜하겐 유엔기후총회의 실망스러운 결과도 결국 중국을 비롯한 발전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에 존재하는 상황인식과 우선순위의 간격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러한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는 중국의 건설적 리더십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국제사회의 공론(公論)의 초점은 무엇보다도 핵무기의 감축·불확산·폐기에 맞춰져 있다. 지난주 워싱턴에서 열린 핵안보정상회의가 그러한 국제여론을 반영하고 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취임 초 프라하 연설에서 약속한 핵무기 없는 세계로의 진전을 실현코자 이달 초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프라하에서 핵무기감축협정에 조인한 것도 비핵화를 갈망하는 지구촌의 압력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인 셈이다. 우크라이나가 2012년까지 자신들이 보유한 고농축우라늄(HEU) 전량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하고 캐나다와 멕시코도 이에 동참하며 비핵화 행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비핵화 노력은 다음 달로 예정된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오늘 히로시마에서는 20여 명의 동서양 전직 정부수반들이 모여 65년 전 경험했던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력에 대해 재삼 상기할 것을 지구촌에 호소하고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핵폭탄의 피해를 직접 입었던 곳으로 수많은 일본인과 상당수의 한국인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는 물론 동아시아의 이웃들은 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비핵화 노력은 중국이 선도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중동에서의 핵무기 경쟁이나 서남아시아에서의 인도·파키스탄 간의 경쟁도 우려되지만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와 시민들은 우선 핵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아시아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아세안 10개국과 한·중·일 3국은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유일한 핵무기 국가로 존립하는 현상을 예외 없이 수용하고 있다. 중국은 이러한 이웃 국가들의 입장과 궤를 같이해 동아시아에서 또 다른 핵보유국의 출현은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확고히 함으로써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냉전의 판도를 바꾼 미국과의 국교정상화 결정이나 20년 후 개방과 본격적 시장경제전환으로 경제대국을 이룬 선택에 버금가는 역사적 결단과 선도적 역할을 아시아는 다시 한번 중국에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시아의 세기’의 문을 여는 역사적 결단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홍구 칼럼 전 총리·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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