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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지식인 지도] 갈퉁과 한반도 평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요한 갈퉁 교수는 1970년대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유신 독재 아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집에 연금되어 있을 때 그를 격려 방문하기도 했고, 89년 전대협 대표로 방북했던 임수경씨가 평양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을 때는 그녀를 격려하기 위해 병원을 찾기도 했다.

90년 서울을 찾은 갈퉁 교수가 세미나 기조연설을 통해 임수경씨의 구속을 비판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당시 국무총리가 어떻게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옹호하느냐고 언짢아하자, 그는 비폭력 통일운동가를 범법자로 만드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게 순리 아니겠느냐고 대꾸했다.

몇 년 뒤 그는 남북한이 화해와 협력을 통해 통일을 지향할 때가 남한에서도 임수경 기념비가 세워질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말을 남겼다.

96년 이른바 '강릉 잠수함 사건' 으로 남북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는 황장엽씨를 포함한 남북의 평화학자들을 유럽으로 초청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찾아보려 했지만 다음해 黃씨가 남쪽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이 꿈은 깨지고 말았다.

99년 서울을 방문한 그는 대통령이 돼 있는 김대중씨를 만나 70년대의 민주화 투쟁을 회상하고, 귀순자로 변해버린 황장엽씨를 만나서는 그의 탈북이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그는 96년부터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서울을 찾았고, 지난해에는 두 번째로 평양을 찾았다. 올 10월에는 서울의 한 연구소와 충북의 한 대학에서 초청을 받아놓은 상태다.

그가 지금까지 펴낸 80여 권의 책 가운데, 95년 영국과 일본에서 출판된 일본 이케다 박사와의 대담집은 97년 손대준 교수에 의해 『평화를 위한 선택』이란 제목으로 번역.출판되었고, 96년 런던에서 나온 『Peace by Peaceful Means』는 나와 동료 학자들에 의해 지난해 『평화적 수단에 의한 평화』란 제목으로 번역돼 나왔다.

그는 평화학자일 뿐만 아니라 평화 운동가로서 세계 각지의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왔는데, 우리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과 관련해 그가 제안한 것 가운데는 중립화 통일 방안도 있고 동아시아 공동시장을 통한 평화 방안도 있다.

지리.역사.문화적인 측면에서 여러모로 공통점을 지닌 남북한과 중국.일본.베트남 등이 공동 시장을 만들어 경제 협력을 이루고, 이를 통해 안보 협력 기구도 만들 수 있다면 한반도의 통일과 동북아의 평화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철길과 도로가 이어져야 하고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해저터널이 뚫려야 한다고 90년대 중반부터 유엔 등 국제 기구와 남북한 당국에 제안해왔다. 철길과 도로를 통해 먼저 물자가 오가고, 사람이 오가며, 정보까지 오가게 되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안정과 번영은 저절로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터에 지난해 6월의 남북 정상회담으로 남북 사이의 철길과 도로를 다시 잇는 역사적 사업이 시작되었으니, 그는 어쩌면 우리 한민족보다 더 벅찬 감동을 느끼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자신의 조국 노르웨이에서 아내의 조국 일본까지 기차를 타고 달려보는 게 평생 소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재봉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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