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대통령의 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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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LP시절의 명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무엇보다 우아한 울림의 대명사로 기억된다. 그의 스승 구스타프 말러의 해석에도 '한 방' 이 있었지만, 역시 모차르트 교향곡을 빼고 발터를 말할 수는 없다.

간혹 '감상(感傷)이 섞인 비엔나풍의 해석' 을 지적하는 이도 없지 않지만, 그가 모차르트곡에서 이끌어내는 '부드러움 속의 격조' 는 아직도 전설이다. 짚어보고 싶은 점은 발터가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스타일.

따뜻한 인품의 그는 단원들에게 군림하지 않았다. 곡 해석과 관련해 미주알고주알 간여도 없었다. '군악대장' 으로 통했던 완벽주의자 토스카니니와 정반대였던 셈이다. 발터가 리허설에서 입버릇처럼 했던 말은 이랬다.

"아름답게,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게" .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사운드는 변함없는 발터의 것이었다. 옛 거장의 숨결을 문득 떠올린 것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한달간의 여름휴가' 소식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정치권력자가 휴양지에 틀어박혀 물경 31일간이나 쉰다니 그런 여유와 배짱이 놀랍다. 경영자로 치면 지휘자 발터가 '목표제시형 CEO' 로 분류될 것이고, 부시 역시 그 과(科)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휴가로 부시가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최장(最長)의 휴가를 기록했다고 하지만 전임자들도 보름 이상의 휴가가 상식이라고 한다. 좋다. 그러면 우리네라면 어떨까? 한달을 쉬려는 대통령이나 각료도 언감생심 없겠고, 설혹 쉰다 해도 맹비난을 면키 어려울 듯싶다.

역시 풍토가 문제인데 얼마전 모 기업의 책임자 한분이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이 회장으로 물러나면서 인사.경영권을 후임사장에게 넘겼는데도 여전히 직원들이 자기 눈치를 보더란다. 업무능률이 떨어질 뿐더러 후임자에게 힘이 쏠리지 않을 것이 우려됐다.

그래서 내린 결단이 자기 집무실을 빌딩의 위층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아래층에는 얼씬도 않았다. 그 뒤로 기업 채산성이 훨씬 좋아진 것은 물론이다.

그 분은 우리 기업문화에서 거의 예외적으로 '경영권 대물림' 을 거부한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듯싶다.

한데 그가 이런 말도 했다. "각료들의 책임행정 문제요? 간단할 수도 있지요. 대통령 집무처를 아예 대전쯤으로 옮기면 어떨까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맡긴다는 시그널이죠" . 우리 실정에서 다소 먼 얘길까? 그렇다면 대통령 휴가부터 한 보름 정도로 늘려보는 아이디어는 어떨지….

조우석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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