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잡은 북한·러시아 ] 미군철수 카드로 부시 압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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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4일 발표된 북.러 정상회담 공동선언은 세계 전략 차원에서 미국의 일극지배 체제를 견제하면서 양자관계를 복원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만큼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에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양국이 북한의 미사일 개발이 평화적인 것이라고 못박고 탄도탄요격미사일(ABM)협정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라고 한 것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MD)구상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다.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꺼낸 것도 한 맥락이다. '철수문제' 는 지난해 7월의 양국 공동성명에 없었던 것으로 북한은 대미(對美)포괄적 협상을, 러시아는 미국과의 ABM 개정협상을 각각 겨냥했다.

모스크바의 전문가들은 이 조항이 양국 공동선언에 포함된 것은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한 러시아의 이해와 지지를 확보했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 러시아를 후원자로 확보, 재래식 군비감축 문제를 제기한 미국을 압박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대미 대화의 문을 봉쇄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북.미 대화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북한도 미국의 큰 관심사인 미사일 시험발사에 대해 2003년까지의 발사 유예를 재확인한 것이다.

북한으로선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서도 대미 관계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번 회담은 양국관계 측면에서도 획기적이라는 평가다. 양국은 정치.군사.과학.문화에 관한 협력협정을 체결했고, 시베리아횡단철도(TSR)-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과 북한의 전력부문 재건에 관한 러시아의 지원에도 합의했다.

TSR-TKR 연결은 러시아, 전력부문은 북한의 요구에 각각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40억루블에 이르는 북한의 대러시아 채무문제는 환율문제에 대한 입장차를 메우지는 못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이번 회담이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에게 해외무대 공식 데뷔라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국가 원수자격의 해외 공식방문은 이번이 처음인 만큼 그의 외국 행보는 잦아질지 모른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회담은 또한 러시아에는 동북아에서의 발언권 확대를 위한 더할 나위없는 무대였다. 북한에 대해 남북대화 재개와 대미.대일 교섭의 진전에 대한 기대를 표명함으로써 앞으로 북한-한.미.일간의 가교역을 맡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북한이 남북, 북.미회담에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는 미지수다. 공동선언의 메시지가 너무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남북대화, 북.미관계에 대한 입장은 9월의 장쩌민(江澤民)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이후 분명해질 전망이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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