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천재 이상, 식민지 시절 도쿄서 뭘 생각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도쿄도 분쿄구의 도쿄대학 부속병원 관리·연구동 건물. 문학평론가 서영인씨는 “이상은 1937년 당시 중앙진료동이었던 이 건물에서 진료를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채워질 수 없는 영구한 공석을 하나 만들어놓고 상은 사라졌다. (…) 시단(詩壇)이 갑자기 반세기 뒤로 물러선 것을 느낀다. 내 공허를 표현하기에는 슬픔을 그린 자전(字典)속의 모-든 형용사가 모두 다 오히려 사치하다. ‘고(故) 이상(李箱)’-내 희망과 기대 위에 부정의 낙인을 사정없이 찍어놓은 세 억울한 상형문자야.’

박제가 돼버린 천재. 극도의 육체적 피로 속에서만 은화(銀貨)처럼 맑아지는 정신으로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부리며 시대와 문학을 조롱했던 전무후무한 실험주의자. 그 자신 빼어난 시인이었던 김기림(1908∼?)조차 이상의 사망 두 달 뒤 월간지 ‘조광’에 실은 추모글에서 한국 현대시가 50년 후퇴했다며 아쉬워했던 이. 시인이자 소설가, 건축가였던 이상(1910∼1937)이 태어난 지 올해로 100주년, 사망한지 73주년이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생애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서울대 국문과 권영민 교수는 “이상이 남긴 텍스트 전체보다 그에 대한 해설의 분량이 훨씬 많다”고 말한다. 해석의 어려움 때문이다. 시인 장석주씨에 따르면 대표작인 연작시 ‘오감도’ 제1호에 나오는 ‘13인의 아해’를 놓고도 해석이 분분하다. ‘예수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13인’‘일제하의 13도’ 등 사람마다 다르게 읽는다.

이상은 죽기 전 지인들에게 센비키야의 멜론이 먹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센비키야는 19세기에 문을 연 도쿄 긴자의 고급 과일가게다. 사진은 센비키야의 옛 모습.

이상의 생애, 특히 일본에서의 최후는 일화(逸話)를 넘어 거의 전설 수준이다. 우선 그의 일본 행부터 석연치 않다. 이상은 기생 출신 동거녀 금홍이 사납게 굴면 몸을 피해 찾았던 절친한 소설가 박태원 등 친구들의 만류를 극구 뿌리쳤다. 일본 가서는 ‘날개’ ‘오감도’ 같은 실험적 작품 말고 정통적인 시·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다. 훗날 화가 김환기와 결혼해 김향안으로 이름을 바꾼, 이화여전 출신의 자유연애주의자 변동림과 결혼한 지 불과 넉 달만인 1936년 10월의 일이다.

하지만 알려진 대로, 이상은 기대를 품었던 도쿄에서 서양을 베낀 껍데기일 뿐인 이른바 ‘모조(模造)된 현대’를 읽는다. 도쿄역 앞 고층빌딩 ‘마루노우치’에서 환멸을 읽고, 거리에서 몹시 가솔린 냄새가 난다고 투덜댄다. (산문 ‘동경’) 급기야 일본 경찰에 체포돼 한 달간 구금된 후 지병인 폐병이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된다.

17일은 이상의 기일이다. 와세다 대학 교환연구원으로 있는 문학평론가 서영인(39)씨의 도움을 받아 13일 이상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 나섰다. 이상이 입원해 최후를 맞은 분쿄(文京)구의 도쿄대 의학부 부속병원부터 방문했다. 소설가 김연수의 장편 『꾿빠이, 이상』은 이상 매니어인 서혁민의 상상을 통해 이상의 최후를 실감나게 전한다. 환자를 접한 일본인 레지던트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방치했냐’고 나무라자, 한인 학생들이 ‘괜히 왜놈 병원에 왔다’며 흥분하는 대목이다.

당시 병원 건물은 현재 원장실이 있는 관리·연구동으로 쓰이고 있다. 김연수는 이상이 숨진 곳은 병원건물 북쪽 격리병동이었다고 소설에 썼다. 다다미방 물료(물리치료)과 병실도 언급한다. 격리병동이 물료과 병실인지는 분명치 않다. 의대도서관을 찾았다. 옛 사진이 나온 책자 『의학생과 그의 시대』에서 1918∼45년 지금의 도쿄대 남문 왼쪽에 ‘물료내과병실’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연수가 언급한 격리병동과는 반대 방향이다. 이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발길을 서쪽으로 돌려 지금은 치요다(千代田)구로 바뀐 간다(神田)구 이상의 하숙집 자리를 찾았다. 의대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다. 권영민 교수가 임종국 편 『이상전집』에 나온 하숙집 주소 ‘101-4번지’가 잘못됐다며 ‘10-1번지 4호’로 바로잡은 곳이다. 역시 흔적도 없다. 센슈대학 7호관 고층 건물이 서 있다. 서영인씨는 “이상은 도쿄에서 급조된 근대에 대한 환멸은 물론 도쿄의 흉내에 불과한 경성의 근대성에 대해서도 반성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병사했다”고 말했다.

여전히 작품 해석과 창작에 있어서 넘어야 할 장벽인 이상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김연수씨의 접근 방식이 시사적이다. 김씨는 “이상은 예술은 물론 삶과 죽음까지도 철저히 모더니스트였다”라고 말했다. 또 “한국문학의 큰 두 조류 중 하나인 모더니즘 계열 작가들은 여전히 이상의 영향 안에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런데도 기인(奇人)적인 측면만 주목해 그의 삶과 문학을 스캔들로 대하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김씨는 그러면서 이상의 산문 ‘권태’‘산촌여정’ 등을 추천했다. “소설이나 시보다 빼어나다”는 것이다. 읽어보니 빼어난 문장가, 이상이 보인다. 이상은 역시 열린 텍스트다.

도쿄=글·사진 신준봉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