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노트북을 열며] 왜 이제야 비상경영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면 누구나 구실을 찾으려 든다. 한국을 대표한다는 삼성전자나 포철 같은 대기업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그런데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상반기 경영실적이 안좋은 이유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으니 말이다. 이들은 미국 경제 탓이라고 말한다. 세계 경제의 엔진으로 불리는 미국이 부진에서 헤어나지 못함으로써 그 유탄을 맞았다는 것이다.

*** 기업 실적악화 미국 탓?

미국뿐만이 아니라는 얘기도 덧붙인다. 실제로 일본 경제는 10년 불황도 짧다며 연장전에 돌입했으며, 상대적으로 괜찮다던 유럽 경기도 갑자기 나빠지고 있다. 한마디로 불가피한 외부 요인에 의한 실적악화라는 것이다.

때마침 국내외 언론들도 '세계 경제 동시불황 조짐' 이라며 대서특필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구실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의 설명이 여전히 궁색하게 들리는 것은 왜인가.

이들이 내세우는 미국 경제의 부진은 이미 1년 전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2분기 5.7%에 달했던 미국의 성장률은 3분기에 1.3%로 주저앉았다. 고성장과 저물가의 오랜 동거(同居)라는 신경제의 불가사의(不可思議)가 한계에 달했던 것이다.

희망찬 21세기의 첫 해라는 사실을 뒤로 한 채 미국 기업들은 연초부터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세계 2위의 통신기기회사인 모토로라, 지구촌 최대의 자동차회사 제너럴 모터스(GM), 유명 PC메이커 게이트웨이 등이 잇따라 감원을 포함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불황이 다가옴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실제로 미국 경제는 올 1분기 1.3% 성장에 이어 2분기엔 0.7%(잠정치)에 그쳤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지는 "미국 경제가 거의 성장을 멈췄다" 고 보도했다.

문제는 해외 경제가 예고된 대로 안좋은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을 때 우리 기업들은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것이다.

주주 구성으로 볼 때 삼성전자와 포철은 더 이상 한국 기업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다. 7월 30일 현재 외국인 투자자 지분율은 삼성전자가 56.5%, 포철은 거의 60%에 이른다. 세계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는 런던증시에, 조강(粗鋼)생산 기준 세계 최대인 포철은 뉴욕과 런던증시에 다 상장돼 있다.

이 정도의 글로벌 기업이라면 국내외 환경을 따로 따지는 것이 우습다. 당연히 지구촌 전체를 하나의 시장으로 보고 경영전략을 짜야 한다. 세계 경제에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면 바로 반응을 보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삼성전자는 7월 20일 2분기 영업이익이 1분기에 비해 63%나 격감한 사실을 발표하고, 사흘 뒤에야 비상경영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그로부터 다시 1주일 뒤 "부침이 심한 메모리 칩으론 한계가 있다" 며 "앞으로 비메모리 칩 생산에 주력하겠다" 는 2010년까지의 중장기 전략을 발표했다. 반도체 가격 하락세가 이미 지난해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왜 이제서야 이런 계획들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포항제철 역시 지난달 하순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에 비해 30%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주력제품의 하나인 열연코일의 평균 수출가격이 지난해 6월 t당 2백73달러에서 최근 1백90달러선으로 떨어졌다.

최고경영자가 "올 연말까지 철강가격이 회복될 것이라는 기대를 아예 포기했다" 고 말하고 있으나 수익성 악화를 막기 위한 어떤 구체적인 단기대책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 국제환경변화 민감해야

기업들은 당연히 선진국과는 달리 일시 해고나 감원이 어디 말처럼 쉽느냐고 할 것이다. 현실이 그렇더라도 그 안에서 조직의 긴장도를 높이기 위해 예컨대 자연감원 유도나 가변형 생산조직 구축과 같은 조치들이 적어도 몇달 전에는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무한경쟁 시대에 기업들은 모름지기 동물적 후각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글의 법칙에 따라 남에게 먹힐 위험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심상복 국제경제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