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한국영화 관객몰이 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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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여름철 극장가에 한국영화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한국영화의 상반기 시장 점유율을 39%까지 끌어올렸던 '친구' (곽경택 감독)를 잇는 화제작이 드물었던 영화계가 기지개를 펴는 모양새다.

사실 '진주만' '미이라2' '툼 레이더'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속속 선보이면서 영화 관계자들은 한국영화의 개봉 시점을 놓고 눈치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름철이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한국영화가 전열을 정비, 본격적으로 관객 동원에 나설 태세다.

현재 '친구' 에 이어 우리 영화의 자존심을 지켜가고 있는 작품은 김상진 감독의 코미디 '신라의 달밤' 이다.

지난달 하순 이후 지금까지 전국 3백30만명을 뛰어넘는 관객을 불러들였다. 상반기의 '친구' , '쉬리' (1999년), '공동경비구역 JSA' (2000년)에 이어 역대 한국영화 흥행 4위를 기록했다.

경주라는 고도(古都)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고교 동창생(차승원.이성재)의 상반된 운명과, 그들이 한 여자(김혜수)를 두고 벌이는 사랑담 속에서 펼쳐지는 포복절도의 웃음이 성공 포인트다.

'신라의 달밤' 외에도 개성 있는 한국영화가 줄줄이 극장가를 노크한다.

지난주 개봉한 '노랑머리2' (김유민 감독)는 성전환자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하리수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에서도 성전환자로 나오는 하리수는 아직 배우로선 만족할 만한 연기력을 발휘하진 못했으나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성의 다양한 측면과 성을 둘러싼 사회적 편견 등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27일 개봉하는 로맨틱 코미디 '엽기적인 그녀' (곽재용 감독)의 흡입력도 만만찮을 것으로 보인다. 전지연.차태현이라는 신세대 최고 스타들을 기용한 것은 물론 그들의 톡톡 튀는 성격을 영화 속에 제대로 녹여낸 연출력도 수준급이다.

특히 '강한 여성, 약한 남성' 이라는 최근의 사회적 코드를 능숙하게 소화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호응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상반기의 멜로영화들이 주로 눈물.순정 등에 호소한 고전적인 작품이었다면 '엽기적인 그녀' 는 발랄함과 경쾌함으로 무장한 신세대식 순애보라는 점에서 차별성이 뚜렷하다.

다음달 4일 선보이는 '소름' (윤종찬 감독)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구호를 내건 기대작이다. 드라마.스릴러.공포물 등 다양한 장르를 한데 모아 온몸을 오싹하게 하는 전율을 담은 '소름' 은 지난 20일 끝난 부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선정될 만큼 작품성을 검증받기도 했다.

고아 출신의 택시 기사(김명민)와 아이를 잃고 남편에게 학대받는 편의점 종업원(장진영)두 남녀를 통해 운명의 아이러니와 절망적인 사랑을 거칠고 강렬한 영상에 담아냈다. 망치로 내려치고 칼을 휘두르는 물리적 공포가 아니라 관객의 마음을 점차 옥죄어가는 심리적 공포가 돋보인다.

'손톱' '올가미' 로 한국적 스릴러 영화를 개척해온 김성홍 감독의 '세이 예스' (다음달 18일 예정)또한 무더위를 씻어내는 데 일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양들의 침묵' ' 세븐' 처럼 연쇄 살인범-그것도 동기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섬뜩하다-을 다룬 스릴러다.

올해 한국영화 배우론 최초로 할리우드 영화 '찰리의 진실' 에 참여했던 만능 배우 박중훈이 주연했고, 내면연기에 뛰어난 추상미와 연극무대에서 기본기를 닦은 김주혁이 합세해 단단한 연기진을 자랑한다.

결혼 1주년 기념여행을 떠난 신혼부부 앞에 갑자기 나타난 살인마란 구성을 통해 인간 내면의 공포성과 현대사회의 폭력성이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의욕이 대단하다.

전통적으로 할리우드 영화가 기세를 떨쳤던 여름 극장가. 이들 한국영화들은 90년대 후반 이후 부쩍 성장한 우리 영화의 위상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장기적 현실로 승화하는 데 징검다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박정호 기자

◇ '신라의 달밤' 의 김상진 감독〓개인적으로 영화는 오락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어설픈 메시지의 남발을 경계한다. '언제나 즐기면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자' 는 게 신조라면 신조다. '신라의 달밤' 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담으려고 했다. 캐릭터들이 만화적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코미디라는 장르의 특성을 감안할 때 이런 캐릭터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만화적 요소의 극단적인 부분까지 끌어안음으로써 더욱 유쾌하고 신나는 웃음을 만들었다. 게다가 주.조연들의 연기 호흡이 아주 좋았다. 감독으로서 더 바랄 것이 없는 작품이다.

◇ '엽기적인 그녀' 의 곽재용 감독〓사람들이 많이 즐겁고 행복해질 수 있었으면 한다. 실제로 시나리오를 쓰면서 내 귀여운 딸들의 행동과 언어를 많이 참고했다. 발랄한 두 남녀가 사랑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키워간다는 뜻에서 '엽기적인 그녀' 는 어쩌면 성장영화를 많이 닮았다.

나의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이 시대 젊은이들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그런 마음으로 영화를 연출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열병처럼 번진 '엽기' 라는 소재를 동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왁자함 속에 숨어 있는 순수한 고백을 포착했다.

◇ '소름' 의 윤종찬 감독〓누구나 살아가면서 소름 돋는 공포를 느꼈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유도 동기도 없이 비극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 비슷한 것 말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런 비극적인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이다.

'소름' 은 그런 비극의 중심에, 철저히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들어서버린 두 남녀의 이야기다. 누구나 한번쯤 겪었을, 혹은 앞으로 겪어야 할 삶의 공포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핏빛 공포가 난무하지도 않고, 엽기적인 살인마도 내세우지 않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리적 공포를 형상화했다.

◇ '세이 예스' 의 김성홍 감독〓구조적인 갈등을 배제하고 공포 그 자체에 주목한 스릴러다. 순수한 공포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 두 남녀가 느닷없이 당하는 공포를 소재로 했다. 이유도 없이 가해지는 폭력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그리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젊은 세대들에게 재미있게 다가설 수 있게 많은 신경을 썼다. 한정된 세트장에서 인물 위주로 사건을 펼쳐가는 기존의 스릴러와 달리 80% 이상을 전국 로케이션으로 촬영, 파워풀한 영상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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