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외세의 파도는 높아가는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동아시아에서는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일까? 국제정치에서 국가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논쟁이 엊그제였던 것 같다.

그런데 일본은 교과서 왜곡, 총리의 신사참배 결정 등으로 국수주의 경향을 강화하고 주변국들과의 긴장을 야기하고 있다. 이 문제의 구조적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 美서 日 군사적 역할 활용

전승국 미국은 군정 초기에 무엇보다 일본 군국주의의 뿌리를 뽑고자 재벌해체.노조결성.토지개혁.전범처벌 등에 힘썼다. 그러나 194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세계 정세는 미국이 예측하지 않았던 냉전대결 구도로 굳어져가고 있었다.

그러자 정책의 핵심은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을 지원해 일본을 동아시아 냉전 전략의 교두보로 삼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 결과 미군정은, 제국주의 침략을 주도했고 정치 행정능력을 갖고 있던 대부분의 관료들을 숙청하지 않았으며 이들은 결국 일본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주창자로 전시활동으로 체포까지 당했던 외무관료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전후 정계에 진출해 보수파의 주류를 형성했고 총리를 다섯 번이나 역임했다.

만주 식민지화의 핵심 역할을 맡았고 전후 A급 전범으로 체포됐으나 풀려났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도 52년 정계에 복귀해 총리를 지냈고 보수파의 또 다른 흐름을 주도했다.

과거 반세기 동안 일본 정치를 지배해온 자민당의 보수 정치인들은 대부분 이들의 역사관을 이어받았다. 철저한 전후처리 과정을 겪었던 독일과는 달리 일본에서는 전전세력과 전후세력간에 단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승국 미국이 주도하는 냉전 국제질서 속에서 보수 정객들은 그들의 속마음을 감히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어쩌다 한번씩 노출돼 파동을 일으키곤 했는데 이제 그들의 '혼네' 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표출돼 정책화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대결의 긴박성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자 미국은 동아시아에 안정자로서의 개입은 계속하되 스스로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강화, 활용하려 하고 있다.

미국의 고위 관료들이 일본 평화헌법의 개정을 원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냉전시의 수직적 미.일 관계가 서서히 수평화돼 가면서 일본 스스로의 독자적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10년에 걸친 경제의 추락과 이를 해결할 개혁적 리더십의 부재에 대한 좌절감도 국수주의 경향에 공헌했다.

오동잎이 떨어지면 가을이 오는 것을 안다고 한다. 일본 국수주의 경향의 강화는 다가오는 동북아질서의 다극화와 불안정화 가능성을 알리는 신호다. 주변국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일본의 군사적 역할은 강화될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12%에 이어 올해는 군사비를 18% 늘렸고 미국의 패권에 대항한다면서 러시아와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도 한국의 외무장관을 두 명씩이나 교체하게 만들 정도로 입김을 드높이고 있다.

*** 남북한도 脫냉전화 급해

일본 정부에 우리의 입장을 단호하게 전달하는 것은 중요하다. 일본의 왜곡된 역사관과 동아시아 평화는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일본 내부의 양심세력과 연대해 극우세력을 고립시키고, 국제여론을 동원해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 미국의 적극적 협조를 구해야 한다.

특히 미국이 앞으로 동아시아 전략을 추진하는 데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활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그에 대한 전제조건, 즉 일본의 철저한 과거사 반성과 동북아 평화에 대한 비전 제시가 선행돼야 함을 주지시켜야 한다.

그러나 이처럼 다극화.불안정화하고 있는 탈냉전 동북아 질서에 대한 일차적 대응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루 빨리 남북한 관계도 탈냉전화시키는 작업이다. 한반도 문제에 주변 4국들의 입김이 갈수록 거세지기 전에 통일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민족 경제공동체는 형성해 놓아야 한다. 동북아 외세의 파도는 높아만 가는데 반동강난 쪽배에 올라탄 채 언제까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을 것인가.

尹永寬(서울대 교수 ·정치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