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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친스 보고서 완역본 '… 언론' 출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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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언론 개혁인가, 언론 길들이기인가?

언론사 세무조사 전후 권언(權言).언언(言言)사이의 갈등이 무한 증폭되고 있는 한국의 최근 언론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연일 신문과 방송을 도배질 하는 주제지만 정작 공감할 만한 판단의 잣대가 부족해 어수선한 현실 속에서 합리적 토론과 성찰을 제공해줄 만한 책이 선보였다. '언론서의 고전' 으로 꼽히는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A Free and Responsible Press)』이 문제의 책이다.

1947년 미국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서도 언론관련 세미나 등이 열릴 때마다 전문가들이 단골로 인용하는 교과서에 해당된다. 위원장의 이름을 따 '허친스 보고서' 로 불리는 이 책이 반세기가 지나 완역된 것은 분명 만시지탄이다.

하지만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 중인 옮긴이 김택환(한국언론재단 책임연구위원.43)씨의 지적처럼 번역의 타이밍은 지금이 오히려 적절할 수도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보고서는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언론의 자유보다 책임을 더 강조하고 있다.

'자유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는 말이 해묵은 주제라고 예단하거나 미국과 우리의 현실이 다르다고 외면하는 자세는 성급하다.

언론이 사회적 진공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듯 이 보고서가 나오게 된 배경이 있고, 바로 그 배경에 대한 이해가 미국적 특수성을 넘어 우리의 현실에도 대입해 볼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총격전까지 일어났던 미국의 신문전쟁=허친스 위원회가 출범할 당시는 아직 2차세계대전이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언론의 소유 집중화와 상업화가 활발히 진행되며 선정주의와 판촉을 둘러싼 신문전쟁이 일어난 시기였다. 시카고의 경우 폭력배를 동원한 언론사간 총격전이 벌어질 정도였다.

타임스와 헤럴드 트리뷴을 포함하는 뉴욕 신문들도 판매전쟁을 벌였다.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친스 위원회가 4년간의 연구를 통해 도출해 낸 결론은 '언론의 자율적 개혁' 쪽이었다.

◇ 거대언론과 자율적 개혁=보고서가 쓰여질 당시에 이미 미국 사회는 거대 매스컴 기관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 매스컴 기관들 역시 권력집중의 한 형태다.

그러나 거대 매스컴을 해체하는 것은 석유 독점이나 담배 독점을 해체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만약 매스컴이 너무 크고 강하기 때문에 해체하는 일에 착수한다면 필요한 서비스도 함께 파괴되고, 매스컴이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면 전체주의를 상대로 한 안전판 자체를 잃게 된다" 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언론자유가 실현되려면 정부는 언론의 목소리를 간섭하고, 규제하고, 억압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해야 한다" 면서 "언론의 자유를 방어하는 최전선은 정부다… 언론의 목소리를 억압하거나 공중의 판단을 형성시키는 데이타를 조작하는 정부의 권한도 제한해야 한다" 고 강조한다.

◇ 공공이익과 언론의 책임=미국 건국 이념인 수정헌법 제1조를 지지한 미국인들의 목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막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표현을 막는 유일한 장애는 정부의 검열이었다.

그러나 보고서가 쓰여질 당시 언론 환경은 건국 초기와 달라졌다. 언론은 거대한 사업체가 된 것이다. 보고서는 말한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이 공공의 이익과 통합될 때에만 언론을 발행하는 사람들의 권리로 남아 있을 수 있다. "

이를테면 보고서는 최대의 수용자를 끌기 위해 언론은 의미 있고 중요한 것 보다 예외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대다수 매스컴은 나이트클럽 살인사건, 인종폭동, 파업폭력, 관료들 사이의 싸움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보도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사건들에 언론이 몰두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다.

시민들이 정작 필요한 정보와 토론을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론이 책무를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민의 권리와 언론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잊혀진 권리를 유지시키는 사회가 되도록 하기 위한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보와 토론을 제공해야 한다. "

허친스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정부의 언론 불개입 원칙 ^언론의 자율적 규제와 질 제고 ^선정주의 배격과 경영합리화 ^상호비판과 전문성 제고 등을 권장했다.

배영대 기자

*** 허친스 보고서는…

*** 허친스 보고서는…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은 '허친스 보고서' 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언론자유위원회' 의 위원장 로버트 허친스 시카고대학 총장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허친스 위원장 외에 윌리엄 호킹 하버드대 명예 철학교수, 라인홀드 니버 유니언신학대 종교윤리학 교수, 해럴드 라스웰 예일대 법학교수 등 당시 저명한 학자 12명이 참여했다.

보고서에서 말하는 '언론(Press)' 이란 신문.방송은 물론 잡지.책.영화까지 망라해 공중에게 뉴스와 의견, 그리고 감정과 신념을 전달하는 모든 수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 연구는 타임사로부터 20만달러(현재 가치로 26억원),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카(영국대백과사전)사로부터 1만5천달러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이 보고서는 미국에서 '언론의 사회책임이론' 이 태동하는 데 모태가 됐고, 영국의 왕립언론위원회 등의 출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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