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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정치는 현실인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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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사회가 정치력 부재와 그에 따른 여야의 극한대립이란 중증을 앓고 있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무엇인지, 정치적 해법은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일들이 정치권 밖에서 일어났다. 물론 정치권은 이런 일들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 大佛갈등 절묘하게 수습

사례1= '정치는 절제의 미학이며 타협의 예술' 이란 것을 보여준 것은 뜻밖에도 불교계였다. 해인사 대불을 둘러싼 불교계 갈등은 처음에는 저잣거리 장사치의 싸움보다 훨씬 지저분해 보였다. '세계 최대' 라는 1960년대식 수식어가 등장했고, 집단 이기주의와 물리적 힘의 과시현상도 나타났다.

가장 종교적이어야 할 선승(禪僧)들이 가장 비종교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듯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이 사건은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은 절묘한 수습책이 나옴으로써 일단락됐다.

세계 최대의 청동대불 건립계획을 반대했던 실상사 승려들은 3주 동안 참회 단식기도에 들어갔다. 이에 호응해 대불 건립계획을 세웠던 해인사측도 참회문을 발표하고 1주일 동안 모든 승려가 참여하는 참회 용맹정진에 들어감으로써 파문을 가라앉혔다.

불교계 내에서는 파문의 전말에 대한 잘잘못이 헤아려지고 승패도 판가름났을지 모르지만 속인들의 눈에야 그저 경탄스러울 뿐이다. 그곳에는 잘못에 대한 사과도 있고 반성도 있었다.

양측 모두 상대가 발목을 잡는 데 대한 울분과 '내가 옳다' 는 고집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러나 상대에게 물러날 명분을 주고, 또 상대를 끝까지 몰아치지 않는 너무나 종교적인, 그래서 정치적이기까지 한 해법을 보여줬다.

사례2=정치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임을 깨우쳐준 것도 정치지도자들이 아닌 서울경찰청의 김강자 방범과장이었다. 지난 한해 서울 종암경찰서장으로 재직하면서 '미아리 텍사스' 를 상대로 미성년 매매춘과의 전쟁을 벌였던 金과장이 지난 6월 초 공창제(公娼制)검토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윤락행위방지법상 윤락은 불법이기 때문에 매춘이 법망을 피해 이뤄지고 있으며, 윤락녀들은 업주의 착취와 폭력 속에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이 "매춘을 합법화하자는 거냐" 고 반발했음은 물론이다.

"윤락가를 없애자" 는 얘기를 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는 용기 있게 이 문제를 제기해 담론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또 정치는 최선이 아닌 차선을 추구하는 것이며, 도덕이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둔 것임을 보여줬다.

매춘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랜 역사와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를 막을 경우 보다 위험한 성범죄를 유발해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정부는 윤락가를 없애려고 덤빌 것이 아니라, 주택가로의 확산과 미성년 윤락을 효율적으로 막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방한한 앤서니 기든스(영국 런던정치경제대)교수는 색깔 논쟁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에 '제3의 길' 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줬다.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복지를, 신자유주의에서 경쟁적 시장경제를 취한 제3의 길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대선 공약과 비슷하다. 이런 변증법적 통합의 지혜는 정치적 갈등을 조정해나가는 과정에서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 동지가 아니면 敵인가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는 그와 대화하면서 "현 정권은 보수노선으로 포장해 당선됐다" 고 지적했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는 서로 '수렴' 된 지 오래다.

따라서 李총재는 현 정권이 집권 후 계속해서 보수세력을 끌어안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점을 책했어야 했다. '동지가 아니면 적' 이라는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는 지탱할 수 없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황장엽씨 방미(訪美)문제를 둘러싼 갈등도 이들 사례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상대의 주장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물러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은 정치의 멋이다. 사회가 갈가리 찢기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정치인의 의무다.

김두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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