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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조종 탁신, 코너 몰린 아피싯 … 침묵하는 국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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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해외서 조종하는 탁신=유혈 사태 발생 하루 전인 9일(현지시간). 친탁신계 반독재민주연합전선(UDD) 회원 1만여 명은 방콕 근교 타이콤 위성기지국에 진입하려다 이를 막는 군·경과 충돌했다.

시위대가 충돌을 무릅쓰고 위성기지국에 진입하려 한 것은 이곳에 친탁신계 위성방송인 PTV의 중계 시설이 있기 때문이었다. 탁신은 해외에 머물며 국제전화·위성 방송 등을 통해 시위대를 ‘원격조종’하고 있다. 지난달 14일에도 “태국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미리 (승리) 축하 인사를 보낸다”는 메시지를 보내 자신의 지지자들을 격려하고 시위를 독려했다. 이 때문에 태국 정부는 전날 PTV의 송출을 중단시켰다. 시위대는 이를 원상 회복시키기 위해 기지국 점거를 시도한 것이다.

탁신이 현재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2008년 8월 해외로 도피한 이래 여러 나라를 떠돌고 있다. 가장 최근에 행적이 발견된 곳은 과거 유고 연방의 하나였던 몬테네그로 공화국이다. 몬테네그로 경찰당국은 지난달 17일 “탁신이 13일 개인 비행기 편으로 두바이에서 입국했다”며 “그는 몬테네그로 시민권자로 경찰은 그를 체포할 아무런 법적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탁신은 태국으로 돌아오면 2년형을 살아야 한다.

◆침묵하는 국왕=태국에서 푸미폰 국왕은 ‘살아있는 부처’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1946년 즉위 이래 태국이 정치적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중심 추’ 역할을 해왔다. 73년 민주화 사태 땐 시민들의 편에 서서 타놈 군사정권을 실각시켰다. 92년 군사 쿠데타 때도 수친다 장군을 질책해 망명길에 오르게 했다. 재임 기간 동안 총 19번 쿠데타가 일어나고 16번 헌법이 개정됐지만 국왕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탁신 정권의 등장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2006년 탁신이 조기 총선을 통해 재집권을 하자 군부는 반탁신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탁신이 실각 후 영국으로 도피한 뒤에도 그의 지지 세력은 연말 총선에서 승리했다. 국민 다수가 국왕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을 한 것이다.

이후 국왕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특히 지난해 9월 고열과 식욕부진 등의 증세로 병원에 입원한 후 사실상 대외 활동을 전면 중단한 상태다. 이번 유혈 사태 직후 반정부 시위대가 “추가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선 국왕이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지만 아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리더십 한계 부닥친 총리=아피싯 총리는 태국 역사상 최연소 총리다. 잘생긴 외모에 깨끗한 이미지,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 경력 등 정치인에게 필요한 덕목을 두루 갖췄다. 하지만 이런 완벽한 ‘프로필’이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농민 등 빈민층은 자신들과 비슷한 출신 배경을 지닌 탁신과 달리, 아피싯에 대해선 “우리와 거리가 먼 귀공자”라며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여론의 ‘싸늘한’ 반응은 2008년 12월, 그가 27대 태국 총리에 오른 뒤에도 계속 됐다. 헌법재판소가 탁신계 정당의 해체를 명령한 덕에 “어부지리로 총리가 됐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관직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 때문에 리더십을 의심 받았고, 집권 연정 내 기반이 허약해 국정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아피싯은 10일 “유혈 사태에도 불구하고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시위대는 “당장 물러나라”고 압박하고 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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