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달마야 놀자' 삭발배우 4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4면

드라마.영화 가릴 것 없이 어디서나 걸쭉한 입담으로 감초 역을 톡톡히 해내는 연기자 김인문(62), '약속' 에서 샘물처럼 솟아나 '링' '교도소 월드컵' 에선 주연을 맡으며 충무로가 주목하는 배우가 된 정진영(37), 난생 처음 영화에 출연하는 여고생 임현경(18), '여인천하' 에서 복성군에게 발길질을 당하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원자 역의 권오민(5). 이 네 연기자가 머리를 삭발하고 스님이 됐다.

다음주 크랭크인 할 '달마야 놀자' (제작 시네월드.감독 박철관)는 절로 피신한 건달들과 스님이 만나 빚는 좌충우돌 대치상태를 그리면서도 진한 인간의 향기에 초점을 맞춘 휴먼 코미디. 난생 처음 삭발한 네 연기자를 도심 속 사찰에서 만났다.

#1

"연기생활 34년 만에 처음 머리를 삭발했다니까" 라고 말하는 김인문씨는 승복을 걸치자 영락없는 스님이었다. 8일 오전 서울 성북동 길상사 마당.

일요일 아침 예불을 위해 그 곳을 찾은 신도들이 승복 차림의 김씨와 마주치자 '배우를 닮은 스님이거니' 하는 표정으로 합장을 했다. 그러자 미동도 없이 자신이 진짜 스님이 된 듯 천연덕스럽게 합장으로 맞는 김씨. 그가 마당을 가로질러 뒤편 언덕으로 갈 때까지 가짜 스님임을 알아챈 불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데 한 관리인이 찾아와 예불 중에 소란스럽다며 취재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또 고승의 자세로 김씨가 나섰다. 공손히 합장을 한 채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어허, 불교에 관한 영화를 찍는데 미리 분위기도 볼 겸해서요. 금방이면 됩니다" 라고 설명하자 퉁명스럽던 관리자의 표정이 언제 그랬느냐 싶게 금세 누그러졌다.

#2

"내 마음의 고향은 영화지. 오랜 만에 비중있는 역을 맡았으니 책임감도 크고 잘 해봐야지 하는 욕심도 막 생기는 게…. " 김씨는 겉으론 차분했지만 내심 들떠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맡은 역할인 고승을 "인간사의 선과 악을 달관한 인물로 극중에서 삶의 페이소스를 잘 표현해야 한다" 고 설명하는 그는 촬영에 들어가기도 전에 극중 인물에 흠뻑 취해 있었다.

사실 그가 말했듯 영화는 그의 고향이다. 1968년 김수용 감독의 '맨발의 영광' 으로 데뷔한 그는 영화가 좋아서 2년 반 동안 했던 공무원 생활을 접고 무작정 상경, 김감독 집 앞에서 13개월을 서 있는 '시위' 를 벌였다. 자신을 배우로 써 달라고. 지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무모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김감독의 눈에 들어 영화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가 1백50여편. 드라마는 셀 수도 없다고 했다. 조연 배우로 알려졌지만 그가 주연을 맡은 작품도 드라마를 포함하면 적지 않다. 그 중 변장호 감독의 '감자' (87년)나 신승수 감독의 '수탉' (90년)등은 지금도 회자되는 수작들이다.

#3

대선배와 함께 자리를 해서 그런지 정진영은 내내 긴장한 표정이었다. 김인문씨가 자리를 비운 사이 담배를 피워 물었다가도 다시 나타나면 재빨리 재떨이를 찾을 정도로. 그도 머리를 삭발한 것이 처음이라 어색할 듯 해 질문을 했더니 "괜찮아요. 아닌가요. 괜찮잖아요" 라고 했다.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한 운동권 출신 배우로 알려진 그는 대학 1학년때부터 줄곧 연극무대에서 활약했다. 97년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 에서 연출부로 일하면서 단역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내밀었지만 데뷔작은 '약속' (98년).

그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았고 이후 '비천무' '링' '교도소 월드컵' 등에 출연하며 연기폭을 넓혀갔다. '달마야 놀자' 에선 '약속' 에서 보스로 모셨던 건달 두목 박신양을 절에서 내쫓으려는 청명스님 역을 맡아 그와 연기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스님 수업이 생각보다 어려워요. 게다가 선무도까지 익혀야 하니까요. 몸은 고되지만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는 것은 항상 즐겁고 신나는 일이죠" 라고 말한다.

네 명의 연기자 중 가장 부산스런 인물은 동자승 권오민. 영화 속에서 고승 옆에서 분위기를 돋울 그는 벌써부터 "스님, 스님" 하면서 김인문씨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아직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도 잘 모르는 철부지지만 '여인천하' 에서 보여준 '연기력' 이라면 영화에서도 문제가 없으리란 게 연출진의 견해다.

이제 한창 친구들과 어울려다닐 여고생 임현경(반포고 3년)은 누구보다 각오가 다부졌다. 절에 침입한 한 건달이 연모하는 연화스님 역이자 영화 중 유일한 여자 배우이기도 한 그는 "진짜 비구니가 됐다는 심정으로 촬영장에 나갈 겁니다" 라고 말했다.

김인문씨부터 권오민군까지 각기 다른 성격의 네 배우들이 빚어낼 산사의 모습은 어떨까. 벌써 궁금해진다. 이미 한 식구가 된 듯 정겨운 그들은 "거칠지만 순수한 인간들의 깨끗한 휴먼 코미디 한 편을 멋지게 만들어 내겠다" 며 각오를 다졌다.

글=신용호.사진=오종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