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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산은 산 물은 물(29)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29) 소식(小食)실천

엉터리 솜씨에도 불구하고 성철스님이 아무 말 안하니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가나보다' 하던 무렵이다.

그날도 잘 차리지 못한 밥상을 큰스님 방으로 들고 갔다. 성철스님이 밥상을 앞에 두고 한참 바라보시더니 답답하다는 듯 한마디 하셨다.

"임마!

니 솜씨 없는 거는 내가 이미 다 알고 있제. 그건 그렇고 이제 내가 니 때문에 배 터져 죽겠다. 이놈아!

이제 좀 잘할 때도 안됐나. 우째 그리 사람이 성의가 없노. 이놈아!"

나 스스로도 시찬 노릇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빨리 칼질에 익숙해질까 하고 나름대로 손가락도 베고 손톱도 날리면서까지 한다고 했다. 그런데 기어이 사단이 나고만 것이다.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힌 채 물러나왔다.

"니 때문에 배 터져 죽겠다" 는 얘기는 내 칼솜씨가 엉터리라 두껍게 썬 감자와 당근을 먹다보니 음식 양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평생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먹는다' 는 소식(小食)을 실천해온 큰스님이니 그 정도의 차이에도 속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은 정성과 함께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한 달쯤 지나니 아침 흰죽도 제법 끓여지고 콩자반도 껍질이 벗겨지지 않고 온전해졌다. 옆에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면서도 감자와 당근을 3㎜ 두께로 일정하게 썰 수 있는 실력이 쌓였다. 솜씨가 잡혀가니 큰스님 공양상 들고 가는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이제는 좀 살 것 같다. 니 놈 때문에 내 배 터져 죽는 줄 알았다. "

칭찬을 거의 하지 않는 큰스님의 말을 귓전으로 들으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시찬의 임무는 반찬 마련에만 그치지 않는다. 방청소도 해야 하고 목욕날이면 등도 밀어드려야 한다.

큰스님 방에 가재도구라곤 앉은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요와 이불, 그리고 좌복(참선용 큰 방석) 하나가 전부였다. 방청소가 힘들 것은 없다. 그러나 방청소를 마치고 나면 꼭 다시 불려가곤 했다.

"이놈아, 여기저기 니 맘대로 놔두고 가면 청소 끝이가?"

나는 분명히 큰스님이 놓아둔 그 자리에 그대로 다시 놓고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큰스님은 늘 야단치셨다. 꾸중을 듣고 돌아서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히 큰스님이 둔 그대로 원위치했는데…. "

정말 내 눈대중으론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큰스님에 따르면 좌복이 그 자리에 있기는 있는데 뒤집어져 있고, 요도 거꾸로 개어놓았고, 책상 위 향로도 방향이 틀리다는 등 죄목이 많기도 했다. 가정집 이불이나 요는 앞뒤가 다르니 금방 구분이 되지만 절집의 경우 요나 이불, 좌복까지 모두 안팎 없이 먹물이니 전후좌우를 분별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큰스님은 매사에 엄격해 물건들이 그 자리에서 몇 ㎝만 물러나 있어도 용서가 없었다. 간단해 보이는 청소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매사를 그렇게 틈 없이 지내니 우리 같은 초보자들이야 하루 내내 긴장 속에 살아야만 했다.

목욕도 그랬다. 지금은 골골이 길이 나고 기름보일러다, 심야전기다 해서 편하게 물을 쓰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하고 사는 절집이 됐다.

그러나 30여년 전 산사에선 장작불로 물을 덮혀야 목욕이 가능했다. 목욕탕도 따로 없어 조그만 방에 한사람 겨우 들어갈만한 사각형 탕을 만들어 놓고 뜨거운 물을 부어가며 목욕을 했다.

보름에 한번 꼴로 날을 잡아 큰스님부터 차례대로 목욕을 했는데, 대여섯 명에 불과하지만 번갈아 때를 불리고 밀고 하다보면 꼬박 하루가 걸렸다. 목욕하는 날, 가장 먼저 목욕을 하는 큰스님의 목욕물을 준비하는 것도 시찬인 내 일이다.

정리=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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