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한 · 일 관계] 上. 3중 악재에 무해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한.일관계가 삐걱거리고 있다. 중학교 역사교과서 파동에 어업분쟁까지 겹쳐 양국 정부.국민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없는 상태다. 현 정부 들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한.일관계의 현주소와 바람직한 해결책을 알아본다.

요즘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본인을 만나면 반응은 두 가지로 엇갈린다. 우익교과서 문제 등 이런저런 양국간 현안에 대해 의견을 물어보면서 호의적인 감정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왜 한국이 간섭하느냐" 고 따지는 등 나쁜 감정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불만을 표시하는 e-메일이나 전화도 종종 받는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1998년 10월 일본을 방문, 당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와 만나 '21세기를 향한 새 한.일 파트너십' 을 선언한 후 한.일관계는 어느 때보다 좋아졌다. 한국 정부는 일본 대중문화의 개방을 허용했고 일본 정부도 올해 한국어를 대입 시험의 외국어 정식과목으로 인정했다.

지난해 일본 내 여론조사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50%를 넘기도 했고, 한국 음식을 찾거나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일본인들도 늘어났다.

그러나 최근의 분위기는 이를 무색하게 할 정도로 냉랭해진 것이 사실이다. 주일 외교소식통은 "양국간에 악재가 많아 가장 어려운 시기" 라며 이런 상황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했다.

◇ 무엇이 문제=한국과 일본 관계를 악화시킨 주요 요인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일본 우익단체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이 만들어 지난 4월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통과한 중학교 역사교과서다. 이 교과서는 일제의 침략 역사를 미화하는 등 심각한 역사 왜곡으로 한국.중국 등 많은 아시아 국가에서 항의를 받았다.

지난해 처음 내용이 알려졌을 때부터 문제가 됐지만 문부과학성이 한국 등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통과시킴으로써 문제가 더욱 불거졌다. 게다가 일본 정부는 한국.중국의 재수정 요구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져 한.일 정부뿐만 아니라 국민간에도 엄청난 갈등을 불러올 것이 확실하다.

둘째는 한.일 어업분쟁이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2월 러시아 정부와 합의해 이달 15일부터 남부 쿠릴열도(북방4개섬)수역에서 꽁치 조업을 하기로 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전에는 민간업체들이 매년 계약하던 것을 정부간 합의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이 쿠릴열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침해한 것이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고는 일본 배타적 경제수역(EEZ)내 산리쿠(三陸)수역에서의 한국 꽁치잡이 허가를 유보하는 보복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도 매년 러시아에 수산자원보전 협력금 명목으로 돈을 주면서 남부 쿠릴열도 수역에서 조업하는 것으로 밝혀져 일본측의 주장에 명분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 사회에 급격해진 보수우익화 물결에 힘입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도쿄도 지사 등 우익정치인들의 발언권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시하라는 잇따른 중국인 비하발언 등으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고이즈미는 한국.중국의 반발에도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강행하려 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 등장에 힘입어 일본 정부는 헌법 개정.집단적 자위권 실행.유사법제 정비.유엔평화유지활동(PKO) 강화 등 군사력 강화 움직임을 보여 한국 등 주변국의 우려를 낳고 있다.

◇ 일본 내 분위기=일본 내에서도 한국.중국과의 관계 악화에 우려의 목소리가 적은 것은 아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8일자 3면 '한국에 비춰진 고이즈미 정권' 이란 기사에서 한국에서 일고 있는 반일 분위기를 상세히 전하고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일본 외교의 수장으로 중국과 우호관계인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외무상도 이를 걱정하고 있다. 야마사키 다쿠(山崎拓)자민당 간사장 등 일본 연립 3여당 간사장이 8일부터 한국.중국을 방문하는 등 일본 정치계도 관계개선의 움직임은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 정부가 실제 행동은 보여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 또 산케이(産經)신문 등 우익언론들은 연일 교과서 문제.어업 분쟁 등과 관련해 한국.중국 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기대하는 것은 내년도 양국이 공동개최하는 월드컵이다.

주일 외교소식통은 "이 행사는 양국에 모두 중요하기 때문에 양국 관계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양국 외교의 근간을 해쳐서도 안된다" 고 강조했다.

도쿄=오대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