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 길라잡이] '조커-학교에 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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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컴퓨터 세상이 되고 나서 고학년 동화는 그야말로 악전고투다. 꽉 짜여진 아이들 일상의 숨구멍을 그나마 사이버 공간이 차지해 버린 탓이다.

아이들이 즐겨 찾는 사이버 공간은 대부분 오락에 그치는 것이라 삶의 성찰을 목표로 하는 문학과는 다르다.

컴퓨터와 대결하기에 우리 동화는 무엇이 모자랄까?

무미건조한 아이들 일상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모더니티의 결핍이라고나 할까, 난 우리 작가들이 감성은 몰라도 현대의 지성에 약한 면을 아쉬워한다.

『조커-학교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수지 모건스턴 지음, 문학과지성사, 2000)를 읽으면서 고학년 동화도 얼마든지 재미있게 쓸 수 있고 나아가 감동의 세계로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방학을 끝내고 학교로 돌아온 아이들 앞에 새로 부임한 늙고 뚱뚱한 노엘 선생님이 나타난다.

그가 첫 수업 시간에 풀어놓은 선물 보따리인 '조커' 카드는 이런 것들이다.

학교에 안와도 되는 조커, 지각해도 되는 조커, 숙제 안해도 되는 조커, 수업시간에 춤춰도 되는 조커…. 아이들은 황당해진 동시에 흥분했다. 그러나 곧 '프랑스 혁명에 맞먹는 반항' 에 익숙해진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가장 값진 인생을 배운다. 아니 인생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법을 배운다. 질서의 파괴자로 몰려 쫓겨나는 늙은 선생님에게 그 반 아이들이 준 선물은 이런 것이었다. '행복하고 영예로운 은퇴 생활을 위한 조커' , 과연 성숙의 소산이다.

'조커' 는 자신의 선택이고 의지다. 또는 현실에서 살짝 비켜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다. 자기 뜻과 무관하게 타인의 결정과 판단에 휩쓸려 살아가는 현대인, 무한경쟁의 쳇바퀴에 끼여 속도의 노예로 살아가는 현대인.

이 작품은 분명히 사실적 기법으로 그려진 것임에도 자꾸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유머와 난센스의 옷을 입은 이런 지성의 작용은 시대에 대한 통찰력을 갖춘 깊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성공하기 힘들다.

이 작품의 테마는 교육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점도 부러웠다.

나는 현대를 살아가는 법을 말해주는 동화 작가가 우리한테 너무 없다는 게 안타깝다. 나처럼 우리처럼 살라고 말하는 어른은 많아도, 그래 그게 진짜 네 뜻대로 사는 길이지 하고 말하는 어른은 만나보기 힘들다.

현대와의 대결을 포기한 현대의 동화 작가는, 컴퓨터 오락으로 달려가는 아이들을 멈춰 세우지 못할 것이다.

원종찬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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