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대학살의 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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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학살의 신’은 단 네 명의 배우로 90분을 꽉 채운다. 특히 서주희(오른쪽)씨와 박지일(왼쪽)씨의 연기는 흡인력이 강하다. [신시컴퍼니 제공]

이 연극, 앞 자리는 피하는 게 좋을 듯싶다. 언제 토사물이 튈지 모르니 말이다.

연극 ‘대학살의 신’. 정말 ‘징한’ 작품이다. ‘학살’이란 단어에 붙잡혀 핍박 받는 소수민족이나 참혹한 분쟁을 떠올리면 큰 오해다. 엄청 웃기면서도 예리한, 블랙 코미디다. 대신 징글징글하게 다툰다. 이제는 그만 하겠거니 하는 순간 언쟁은 또 시작되고, 둘씩 편을 먹고 싸우다 어느새 같은 편끼리 머리끄덩이를 잡는다.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는 이야기다. 막이 오르면 두 부부가 점잖게 소파에 앉아 있다. 변호사 알랭(박지일)과 아내 아네뜨(서주희)는 안절부절못한다. 열한 살 먹은 자기 아들이 친구를 때려 앞니 두 개를 부러뜨렸기 때문이다. 피해자 부모는 미셸(김세동)과 베르니끄(오지혜). 이 부부 또한 막무가내는 아니다.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자근자근 항의한다. “녀석들이 서로 화해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합리적인 결론이 날 것처럼 보인다.

균열은 엉뚱한 곳에서 비롯된다. 휴대전화 벨소리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알랭의 휴대 전화에 대화의 맥은 뚝뚝 끊긴다. 알랭이 전화를 받는 이 짧은 시간, 각자는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는 것 같다. 전화를 끊고 나면, 이야기는 엉뚱한 데로 빠지거나 새로운 논지로 다른 논란을 지핀다. 게다가 결정적 순간마다 벨소리가 울리니 어찌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결정타는 아네뜨다. “여보, 나 속이 안 좋아”하더니 갑자기 토를 한다. 입에서 터져 나온 진짜 분비물이 건더기 채로 바닥에 뿌려진다. (웬만큼 눈썰미가 좋은 관객도 어떻게 이 장면이 연출됐는지 간파하기는 쉽지 않다) 무대는 아수라장이 되고 극은 출렁대며 관계 역시 뒤엉킨다.

캐릭터 열전이다. 초지일관 변하지 않는 인물은 깐죽대며 야비한 알랭이다. 작가이며 아프리카와 미술에 대한 관심이 많은 베르니끄는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지만, 결국엔 처절하게 망가진다. 남편에게 의지하며 전형적인 주부처럼 보이던 아네뜨는 토를 한 다음엔 이판사판 달려든다.

연극 ‘아트’로 지적인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준 작가 야스미나 레자가 썼다. ‘대학살의 신’은 지난해 토니상 연극 부문 최우수 작품상·연출상 등 3관왕에 올랐다. 한국 연출은 맡은 한태숙씨는 극단으로 치닫던, 기존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작품을 세련되게 갈무리했다. 객석을 뻥뻥 터뜨리면서도 중산층의 허위의식, 소통의 부재를 서늘하게 꼬집는 수작이다.

곁다리 하나. 정치인들이나 논객들도 한번 구경하러 오시길…. ‘말싸움의 기술’을 제대로 보여준다. 사과하러 온 아네뜨가 “(내 아이가 받은) 모욕도 일종의 공격이잖아요”라며 폭력의 원인을 물고 늘어지는 건 “사태의 본질 운운”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를 죄인으로 몰고 가려고 무던히도 애쓰시지만, 정작 키우던 애완동물을 죽이신 분은 그쪽 아니신가요?” 같은 대사도 새길 만하다. 논리가 부족할 때, 별 상관없는 딴 얘기로 국면을 돌리는 테크닉이다.

▶연극 ‘대학살의 신’=5월 5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3·4·5만원, 02-577-1987, 1588-7890.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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