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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우리 안의 아파르트헤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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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신붓감을 선택하고 오후에 건강검진을 받고 이튿날 저녁에 결혼식을 올리는 아연실색할 행태 때문이라니 캄보디아의 조치를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노예문서를 연상시키는 여기저기 붙어 있는 ‘신부보증제’ 광고나, 한꺼번에 수십 명 중 한 명을 고르는 인신매매성 맞선. 나라를 국제적으로 망신시키고 혐오하게 만드는 낯 뜨거운 일이다. 그러나 정작 더 우울한 것은 그런 비인간적인 과정을 거쳐 한국에 이주한 여성들이 국내에서 당하는 부당한 차별과 그 자녀들에 대한 사회의 냉대이다. 가뜩이나 온갖 차별의식으로 갈등이 넘쳐나는 우리 사회에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인종차별까지 어느새 뿌리를 깊게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방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차별하게 되면 인간의 존엄과 공동체 정신이 어떻게 훼손되는지는 역사가 웅변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분리 정책 아파르트헤이트는 원주민들에 대한 학살, 살인, 고문, 강간, 린치, 투옥으로 점철돼 인류를 부끄럽게 했다. 만델라가 1994년 총선에서 승리해 장장 340여 년의 잔혹한 역사를 끝낸 지가 벌써 17년이 흘렀지만 바로 엊그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반대한 백인이 살해당하는 등 비극이 끊이지 않고 있다.

흑인 대통령을 배출한 미국도 마찬가지다. 1863년 링컨의 노예해방령 선포 이후에도 유무형의 차별은 흑인들을 옥죄었다. 100년이나 지난 1963년 마틴 루서 킹은 ‘백인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에 흑인 아이들은 자긍심을 약탈당한다면서,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의해 평가되는 나라에서 사는 꿈을 역설했다. 하지만 아직도 명문대 흑인 교수가 백인 경찰관에게 부당한 취급을 받는 등 인종차별 관행은 여전히 미국 사회의 병인(病因)이 되고 있다. 피부색에 혈통과 종족 요인이 혼합된 신분차별 제도인 카스트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인도라는 공동체 구성원의 평등한 권리와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야만적인 제도의 역사는 유구하다. 종교와 풍습과 결합해 불평등 구조를 확대 재생산하면서 누천년에 걸쳐 인도인의 일상을 숙명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섬뜩한 일이다.

우리 사회 안의 차별도 덜할 바 없다. 아파르트헤이트처럼 제도화되고 보이는 차별은 아닐지라도 유무형의 차별이 유령처럼 배회한다. 가장 전통적인 차별 의식인 지역감정을 비롯해 혈연·지연·학연·성별과 같은 것들이 대표적 요인이다. 거기에 경제력, 외모, 주거 지역과 같은 새로운 요인들이 차별감 형성에 가세하고 있다. 자녀 교육을 위한 이동으로 반복되는 특정 지역의 집값 상승과 전세대란은 교육적 배경에 대한 지나친 차별의식이 없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한국이 경제대국을 지향하면서 자리 잡기 시작한 다문화 가정이나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 의식이 최근에는 탈북자 새터민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음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50년 한국 사회의 인구 분포에서 이주민이 35%는 돼야 우리의 경제 규모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이주민을 차별해서는 번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차이가 지니는 다양성과 다산성(多産性)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차별하는 것은 유목하는 인간(자크 아탈리, 『호모 노마드』)의 특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구성원들의 다양한 차이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활용해야 하는 다문화 노마드의 사회다. 노마드와 함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라야 건강하고 인간다운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충격적인 사건과 갈등으로 얼룩진 봄날이지만 백령도의 초계함이 곧 인양돼 침몰의 원인이 속 시원히 밝혀지고, 온 들판엔 아름다운 꽃들과 푸른 새싹들이 지천으로 돋아나리라. 계절을 따라 어김없이 세상에 얼굴을 내민 초목들을 향해 뉘라서 귀한 꽃과 천한 잡초로 구분할 것인가. 한 송이 꽃, 풀 한 포기마다 제각기 장엄한 우주를 품은 생명들일진대 뉘라서 잘나고 못났다고 차별할 수 있을 것인가. 모두가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세상이 아름답다.

김정기 한양대 교수·신문방송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