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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음악 뿌리 둔 음악가들 현대인에 잘 먹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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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현대 작곡가들은 음악을 통해 어떤 메시지나 내용을 표현하고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초연작이 포함된 음반이나 연주회에선 낯선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취지에서 상세한 작품 해설을 프로그램에 싣게 마련이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가 이끄는 현악 앙상블 크레머라타 발티카가 논서치 레이블로 내놓은 앨범 '실렌시오(침묵)' 에 실린 작품들은 다르다. 가령 블라디미르 마르티노프(45)의 '컴인!' 에 대한 정보는 1988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현대음악제에서 기돈 크레머와 타탸나 그린덴코가 초연했다는 언급이 고작이다.

마르티노프는 이 앨범에서 자작곡 해설 대신 한 은둔자가 남긴 교훈을 인용하면서 "음악 자체의 울림에 귀를 기울이라" 고 말한다.

달콤한 현악기가 빚어내는 느린 흐름에 독주 바이올린이 곁들여진 6개의 악장은 변주곡에 가깝다. 실제로 가끔씩 우드블록이 등장해 '천국의 문' 을 두드린다.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하는 명상적인 분위기의 음악이다.

이 음반에는 에스토니아 태생의 아르보 패르트(55)의 '타불라 라사(깨끗한 경력)' (1977)도 함께 수록돼 있다. 이 곡 역시 두 대의 바이올린과 현악합주를 위한 협주곡 형식으로 '놀이' '침묵' 등 2개의 악장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서 놀이(음악)는 삶과 행동이며 침묵은 관조와 성찰이다.

마르티노프와 패르트의 음악은 '영적(靈的)미니멀리즘' 으로 불린다. 이들의 음악은 서구의 물질문명에 대한 환멸과 함께 청각의 한계를 넘어선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 음악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현대음악인데도 듣기에 부담이 없다. 르네상스와 중세의 신비스런 종교음악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음악에서 '반복' 은 일종의 종교적 제의다. 가능한 가장 단순한 음악적 표현의 반복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욕심에 집착하지 말고 자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는 이들의 음악은, 정보의 홍수 시대에 살면서 불안과 초조감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위안과 안식을 제공해준다.

이밖에 헨릭 고레츠키(폴란드.69).존 태버너(영국.57)도 영적 미니멀리즘 계열로 분류된다. 고레츠키는 교향곡 제3번 '슬픈 노래' 로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또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베일 보호하기' 를 발표한 태버너는 다이애나 황태자비 장례식 음악을 맡아 더욱 유명해졌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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