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 국부 → 망명객 하와이 하늘에 꿈과 한을 묻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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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 이승만은 마우나라니 노인 요양원 병실에 누워 창문 너머로 펼쳐진 태평양을 바라보며 고국을 그리워했다. 사진은 그가 머물렀던 202호실 창문에서 바라본 풍경. 호놀룰루의 상징인 다이아몬드헤드(왼쪽)와 와이키키 바닷가가 한눈에 보인다. <2> 노인 요양원 전경. 이승만의 병실은 2층 오른쪽 끝 202호실이다. <3> 마키키 거리의 살림집. <4> 광화문 모양을 본 떠 건설한 한인기독교회 앞쪽.


태평양 한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하와이는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주도(州都) 호놀룰루엔 장년의 독립운동가, 4·19 혁명으로 하야한 노 망명객의 숨결이 곳곳에 서려 있다. 그는 이곳에서 90 평생 중 25년을 살았다. 조국에서 ‘국부(國父)’부터 ‘독재자’까지 양 극단으로 평가받는 그의 한(恨)과 꿈을 따라가 봤다.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서클 5113번지. 1965년 7월 19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90세에 숨을 거둔 곳이다. 그는 마지막 혼수 상태에 빠지기 직전까지도 망향(望鄕)의 한을 토로했다.

교회 마당에 서있는 이승만 동상. 최준호 기자


먹구름이 몰려오는 해거름, 호놀룰루를 동로 가로지르는 H1 고속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달렸다. 호놀룰루의 상징 중 하나인 다이아몬드헤드(분화구) 쪽으로 나오니 산 쪽으로 곧게 뻗은 가파른 언덕길이 나타났다. 길을 따라 2㎞ 이상 올라가니 왼쪽에 ‘마우나라니 너싱 센터’라는 문패를 단 연초록 지붕의 3층 콘크리트 건물이 보였다. 굳이 번역하자면 ‘마우나라니 노인 요양원’쯤 되는 곳이다. 1950년에 문을 연 이곳은 지금까지 두 차례 보수를 했지만 당시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말년엔 부엌 식탁에서 서예로 소일
이승만이 세상을 뜬 지 어언 45년. 하지만 요양원 사람들은 이국 땅에서 숨진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초대 대통령의 흔적을 취재하러 왔다’는 말에 일본계로 보이는 원장은 “아, 그 망명한 한국 대통령 말이지”라고 바로 답했다. 이승만이 머무른 곳은 건물 2층 동편 끝 쪽에 있는 202호실이다. 방 안엔 화장실과 침대 세 개가 있었다. 그는 당시 이 병실을 혼자서 사용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상주하면서 간호했음은 물론이다.

붉은색 커튼을 열어젖히니 창문 너머� 와이키키 해변과 다이아몬드헤드가 태평양을 바라보고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창문 위쪽으로는 흡사 한국의 소나무를 닮은 듯한 나뭇가지가 뻗어 있어 운치를 더했다.

중풍으로 휠체어 아니면 침대 신세를 져야 했던 이승만은 수시로 창밖을 내다보며 “빨리 가야 하는데, 빨리 가야 해…”라며 고국을 향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안타까움을 드러냈다고 한다. 어두운 병실 구석 어딘가에서 이승만의 한 서린 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죽음을 앞둔 그는 병상에서 자신의 생을 되돌아봤을 것이다. 혁명가에서 독립운동가, 정치가, 대통령, 그리고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4·19 혁명에 해외 망명까지…. 영욕이 교차하는 삶이었다.

요양원에서 서쪽으로 6㎞쯤 떨어진 마키키 2033번지의 목조 주택.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던 살림집이다. 높진 않지만 역시 언덕 초입 경사로에 자리 잡고 있다. 1층엔 창고 같은 방이 하나뿐이고, 2층에 사방 3m가 조금 넘는 침실이 두 개, 그리고 부엌 하나가 있다. 이승만은 부엌 식탁에 신문지를 놓고 붓글씨를 쓰며 소일하곤 했다. 그는 하와이에 올 때부터 서울로 돌아갈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이 ‘망명 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몇 주 정도 휴양차 왔다’고만 여겼다. 아니, 자기최면이었을는지도 모른다. 귀국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주위 사람에게 화를 내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1962년 3월 17일, 이승만은 독촉 끝에 결국 비행기표까지 끊어두고 서울로 출발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하와이 주재 한국총영사가 찾아와 귀국을 막았다. 당시 박정희 정부에 그의 귀국은 정치적인 부담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진 노인의 건강은 급속히 나빠졌다. 뇌출혈 증상이 심해지면서 수족이 마비됐다. 중풍이었다.


교민들 당시 거금 4만 달러 모금해 세워
이 박사의 마키키 살림집에서 다시 서쪽으로 4㎞쯤 떨어진 릴리하 거리를 가다 보면 한국 전통 건물이 나타난다. 초록빛 바탕이 선명한 단청을 입고 있다. 언뜻 보면 절집 같지만 광화문을 축소해 놓은 모양의 교회 건물이다. 현판에 ‘광화문’ 대신 ‘한인기독교회’라고 적혀 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이 1918년 세웠다. 하와이에서 그의 꿈과 야망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면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주적 교육이 우선돼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교회 건물 안마당에는 실물보다 조금 큰 이승만 동상이 서 있다. 이 교회가 처음부터 광화문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 개척교회가 으레 그렇듯 초기엔 여기저기를 전전했다. 그러다 1938년 당시로선 거금인 4만1000달러를 모아 조국을 상징하는 ‘광화문’을 본떠 한인교회를 만들었다. 하와이 노동자들의 한 달 월급이 50달러이던 시절이었다. 이승만은 망명 후에도 부인과 함께 이 교회를 찾곤 했다. 하지만 1965년 7월 21일은 마지막 방문일이었다. 700여 명의 교인과 조문객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 예배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잔인하다. 시작보다는 마지막을 더 뚜렷이 기억한다. 그가 세상을 뜬 지 반세기가 다 돼가지만 아직도 독재자로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부패한 왕정에 반대했던 혁명가, 일제에 저항했던 독립운동가, 건국의 주역, 초대 대통령이기도 했다. 우남 이승만 박사 숭모회의 김창원 회장은 “한 사람의 인생을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아쉽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대통령이 조금만 더 일찍 권좌에서 내려왔더라면 독재자 소리를 듣지 않고 명예롭게 생을 마감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호놀룰루=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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