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출간 '열국지' 2종 저작권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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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올 여름 독서시장을 겨냥해 출간된 2종의 『열국지(列國志)』를 놓고 출판계에 논란이 일고 있다. 하나는 원로시인이자 한학자인 김구용(79)씨의 '완역본' 『동주(東周)열국지』(솔출판사.전12권)고, 다른 하나는 소설가 유재주(45)씨의 '평설본' 『열국지』(김영사.전13권)다.

완역본을 낸 솔출판사측은 "내용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책을 평설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출판하는 것은 1차 번역자의 노고를 훼손하는 윤리적 문제" 라며 "국내 유일의 완역본인 김구용씨의 책을 저본으로 했는지를 따져 저작권 저촉 여부를 검토 중" 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평설본을 낸 김영사측은 "중국의 원본을 비롯해 다양한 참고서적을 보고 소설가가 자신의 감상을 섞어 재구성한 것" 이라며 "우리 출판계의 관행이기도 한 이 문제에 대해 공식 지상논쟁을 벌여도 좋다" 고 말했다.

완역(完譯)이란 원본의 한 글자 한 글자를 모두 번역했다는 것이고, 평설(評說)이란 비평하여 설명한다는 뜻이다. 김씨의 책은 '김구용 옮김' 으로 돼 있는 데 반해, 유씨의 책은 '유재주 지음' 으로 돼있다.

김씨의 책은 지난 60년대 후반 세로쓰기 판형으로 처음 나왔고, 90년에 민음사에서 개정 출간됐다 이번에 솔출판사로 판권을 옮겨 수정작업을 거쳐 펴냈다. 유씨는 모 지방신문에서 일부 연재하던 것을 다시 쓴 자신의 소설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원본은 명나라 때 풍몽룡이 쓴 대하 역사소설 『동주 열국지』. '동주' 란 춘추전국시대의 별칭이다. 기원전 8세기에서부터 기원전 3세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 5백50년 간 명멸했던 수많은 나라들(列國)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흔히 전쟁과 살육의 난세(亂世)라 불리기도 하지만 유가.도가.법가 등 중국 문명의 기초를 이루는 사상들이 태동하여 백화제방(百花齊放)의 문화적 황금기를 구가한 역설적 시기가 이 책의 배경이다. 지금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오월동주' '와신상담' 등 수많은 고사성어의 역사적 설명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소설 삼국지에 버금가게 재미있다고 평가 받는다.

성균관대 국문과 교수를 지낸 김구용씨는 네살 때부터 금강산 마하연에서 불교와 한문을 배웠고 삼국지.수호전 등도 완역한 바 있다. 국문학을 전공한 유재주씨는 장편소설 『북극의 신화』 『검』에 이어 고대 중국을 무대로 한 역사소설 『공명의 선택』을 낸 바 있다. 대학시절에 김구용씨의 번역본을 보고 처음 '열국지' 를 알게 되었다는 유씨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해설을 곁들인 소설' 이라는 작의적인 의미에서 평설이란 말을 붙였다" 고 밝혔다.

소설에 '평설' 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은 최근 우리나라만의 현상이라는 것이 학계의 지적이다. 홍광훈(서울여대 중문과)교수는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 때 평점(評點)이란 말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김성탄.이탁오 같은 사람들이 삼국지나 수호전 등 소설에 방점을 찍으며 자신의 감상을 적은 형식인데, 그것은 원문을 그대로 둔 채 각 페이지의 위쪽에 느낌을 적는 문학비평" 이라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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