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하병준] 기성(棋聖) 섭위평(聶衛平)과 한국 바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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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80년대, 개혁개방의 문호를 열었지만 여전히 국제무대에서 낙후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던 중국. 이런 중국인들이 세계 무대에 내세울 수 있었던 2가지 브랜드가 있었으니 바로 당대 최강 여자배구와 중국 바둑의 총아(寵兒) 섭위평(聶衛平)이었다.

수천 년의 역사가 깃든 바둑의 종주국, 중국. 하지만 현대 바둑은 그런 중국이 아닌 일본에서 출발한다.

중국이 세계 최초로 발명했다는 4대 발명품인 인쇄술∙나침반∙화약∙종이, 이 모든 것이 초원의 길과 바닷길을 따라 지구 반대편에서 꽃을 피운 후 지난 19, 20세기 중국의 심장을 겨눴던 것처럼 당시 바둑 역시 왜국(倭國)라 불리며 문화 후진국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일본에서 꽃을 핀 후 중국의 목덜미를 노리고 있었다.

1985년 중일 양국 슈퍼 대항전에서 절대 우세를 자신하던 일본과 죽의 장막을 걷어 젖히고 세계 바둑계에 첫 모습을 드러내는 중국과의 일전은 승부의 결과를 너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400명 이상의 풍부한 프로바둑 기사를 보유한 일본에는 고바야시 고이치∙고바야시 사토루∙다케미야 마사키∙가토 마사오∙후지사와 슈코 등 바둑계를 호령하던 기라성 같은 고수들이 즐비했기에 누가 나서도 중일 대항전의 우승을 장담할 수 있었다.

天有不測風云,人有旦夕禍福。
하늘의 변화는 예측할 수 없고 인간 화복 역시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대회의 첫 수가 착점(着點)되자 일본의 예상과는 다른 전개가 나타났다. 중국의 강주구(江鑄久)가 5연승을 하며 일본의 기를 꺾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일본은 당시 세계 최강이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출격시켜 6연승을 기록, 대회 우승을 눈 앞에 두게 되는데 이 때 기적이 일어난다. 산소통을 입에 문 섭위평 9단이 고바야시 고이치, 가토 마사오, 후지사와 슈코 9단을 연파하고 중국에 우승컵을 안긴 것이다. 이후 그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었다.

2회 대회 역시 최후의 수문장으로 나와 6연승, 3회 대회에서도 마지막 주자로 2연승하면서 중국 바둑의 위력을 세계 만방에 떨쳤다.

그리고, 1988년 3월 26일 그는 중국 바둑계 유일(현재까지도)한 기성(棋聖)의 칭호를 받으며 국가 영웅이 된다.

만약 그의 세계 챔피언 등극을 위해 만들어진 응씨배(應氏杯)에서 조훈현(曹薰鉉) 9단이 섭위평을 잡지 못했다면 아마도 그는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배한 기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시 아웃사이더이던 한국 바둑과 조훈현의 등장은 그의 바둑 인생 최대의 한으로 남을 듯싶다. 그가 기른 제자 상호(常昊, 국내에서는 창하오라고 불리고 있음) 역시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에 의해 오랜 세월 2인자로 남았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六年下放磨一劍,6년 동안 하방 속에서 실력을 갈고 닦으니,
絕藝如君天下少。그 뛰어난 실력 천하에 맞수를 찾기 힘드네
山外青山樓外樓,허나 세상은 넓고 뛰어난 자는 많은 법
天既生聶,何生曹。하늘은 섭위평을 낳고 왜 또 조훈현을 낳으셨나.

그런 그가 “한국 바둑은 기예(技藝)가 결핍되고 속임수가 난무하는 전투 일변도의 승부바둑에 불과하다”면서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서 속임수는 당연하다(兵者,詭道也)-손자병법(孫子兵法)”라고 했다.
반상(盤上)의 전쟁, 360로(路) 속의 우주전쟁인 바둑에서 승리를 위한 전투와 속임수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만약 기도(棋道), 기예(棋藝)라는 말에 사로잡혀 정면승부, 정도(正道)만 강조한다면 춘추시대 송양왕(宋襄王)의 송양지인(宋襄之仁)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수담(手談)의 스포츠 바둑에서 중용(中庸)에 나오는 것처럼 상대에 맞춰 나아감과 물러섬을 조절할 줄 알아야(進退自如) 바둑의 진의(眞意)를 제대로 깨우칠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기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섭위평 9단이 기성의 칭호를 받은 오늘, 한국 바둑의 벽에 막혀 세계 타이틀을 손에 쥐지 못한 그가 중국 바둑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만큼 좀더 넓고 큰 배포를 가지고 한국 바둑을 인정하는 진정한 기성이 되길 바란다.

하병준 중국어 통번역, 강의 프리랜서 bjha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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