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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슬픈연가' 출연하는 홍석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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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4년이면 세상은 얼마나 변할까. 4년 전 얼굴이 알려진 사람으로는 처음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밝혀(커밍 아웃) 파문을 일으켰던 연기자 홍석천(33).즉각 방송 출연 정지를 당하는 등 뭇매를 맞았던 그가 최근 타임지 아시아판이 선정한 '아시아의 젊은 영웅 20인'에 포함됐다. 지난 달 29일에는 MBC '논픽션 공감'이 그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내보내기도 했다. 홍석천은 지금 미국에서 드라마 '슬픈 연가'를 촬영하고 있다. 미국행 티켓을 받아든 지난 달 28일, 홍석천이 운영하는 서울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슬픈 연가'는 김종학 프로덕션이 기획한 국내 첫 독립제작 드라마. 출연 소식을 들은 친한 기자가 그에게 "좋은 일인데 알려야지"라고 말하자 그는 "아직 촬영 시작 안 했어. 기사 쓰지마!"라며 뜯어 말렸다. 출연한다는 소문이 나자마자 "윗선에서 반대한다"는 이유로 배역이 취소되는 쓴 맛을 4년 내내 본 탓이다.

"드라마 분위기를 밝고 재미있게 만드는 조연을 맡았는데 너무 오버할까봐 걱정이에요."

사실 그는 같은 동성애자들에게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에서 보여준 '여자 같이 구는' 게이 이미지 때문이다. 커밍 아웃 이후 "왜 하필 홍석천이냐. 안 그래도 게이 같아 보이는 사람이라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배역의 개성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연기한 것뿐이에요. 일반인들이야 그럴 수 있다 해도 동성애자들의 비난을 견디기 어려웠어요." 그러나 올 초 SBS '완전한 사랑'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평범한 동성애자 역을 맡은 뒤 사정이 달라졌다.

"게이도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줬죠. 사실 그게 동성애자들의 진짜 모습이기도 하고요."

커밍 아웃 이후 그는 일부러 지하철.버스를 타고 다녔다. 동성애자가 별난 사람이 아니라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그만의 투쟁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안녕, 나 게이야. 넌 뭐니?'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외국 문화가 부러웠어요.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 나서서 '나 게이야'라고 밝히면 많은 게 바뀔 거라 생각했어요. 자신에게 솔직하고 싶었고요."

그러나 세상은 생각보다 가혹했다. 커밍 아웃 이후 그는 투사가 됐다. 동성애자에 대한 특강을 하고 장애인 등 약자를 위한 활동도 했다.

"주류에서 비주류로 편입되고 보니 그 전엔 인식 못했던 사회적 약자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저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요…"

그가 원래 지지하던 정당은 아니지만 최근 민노당에 가입했다. 민노당이 '성소수자위원회'를 만든 게 고마워서다.

"커밍 아웃을 하지 않았다면 사회랑 힘들게 안 싸웠을 테고 돈도 많이 벌었겠죠. 하지만 지금처럼 성숙하진 못했을 거예요. 이제 남들을 속일 필요도 없어 기본적으로는 행복해요. 그러나 내가 자랑스러우면서도 가끔은 개인 홍석천이 아니라 사회인 홍석천으로 살 때가 더 많은 것 같아 가슴이 메어요. 동성애자로 태어난 것도, 커밍 아웃해서 고생한 것도, 동성애자의 대표로 이렇게 인터뷰하는 것도 불쌍해요. 하지만 그게 나니까…"

글=이경희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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