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골학 공부할 땐 침구도 제대로 펴지 않은 스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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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호 31면

도원(道原) 류승국(柳承國) 교수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30년이다. 그동안 많은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아직도 뵐 때마다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다. 가볍게 시작한 말씀이 강의가 되고 강의가 끝나면 ‘감발흥기(感發興起)’한 제자들의 마음속에 물결이 일렁인다. 박학에 열정, 명쾌한 논리까지 겸비한 교수님은 그야말로 박문약례(博文約禮)의 전형이다.

내가 본 류승국 박사

교수님은 가끔 누에를 예로 들어 제자들을 면려하곤 하였다. 누에는 반드시 네 잠을 자고 난 뒤 하얀 실을 토해내 제 집을 짓는데, 실의 길이가 수십 리에 달한다는 것이다. 큰 학자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일 터이지만 나는 이 말씀이야말로 교수님 자신의 학문 역정과 경지를 술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간난(艱難)과 격동의 시기에 학문을 하면서 ‘성인의 학문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외길을 걸어온 교수님은 철학자로서 명석함은 율곡을 닮은 것 같고, 교육자로서 투철함은 퇴계를 본받은 듯하다. 또 구도자로서의 자세는 공자의 구도 정신과 포은(圃隱·정몽주), 정암(靜庵·조광조), 우암(尤庵·송시열)의 내직(內直)한 의리정신을 계승한 듯하다.

교수님은 역리(易理)를 깊이 탐구하였다. 『주역』과 『중용』은 동양철학의 기본이요, 철학적 통찰과 예지의 근원이 된다. 통유적(通儒的) 기질을 타고난 교수님은 “철학자는 체용해비(體用該備)해야 한다’고 하면서 현실을 외면하는 철학은 살아 있는 철학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현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보편 타당한 대안 제시, 미래에 대한 명철한 전망은 철학 하는 이들에게 본이 되고 남음이 있다.

교수님은 천재형 학자다. 여기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 광대(廣大)와 정미(精微)를 다하였다. 1960년대에 갑골학을 공부하느라 3년 동안 제대로 침구를 펴고 잔 적이 없을 정도였다는 사실은 타고난 재질에 못지않은 근면 성실함을 잘 말해 준다. 유가(儒家)를 본령으로 하면서 불교와 노장철학, 제자백가를 회통(會通)하고 서양철학까지 겸하여 동서를 섭렵하였던 교수님의 학문 세계, 여러 분야를 섭렵하면서도 그 핵심 내용과 특징을 명확하게 짚어내는 탁월한 능력은 누구나 쉽게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닐 듯하다.

교수님은 철학자의 자질을 타고났다. 논리적 명석성에다 직관력·예지력을 겸비하였고 도저한 사색과 뛰어난 분석, 정밀한 고증 등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다. 철학 하는 태도와 연구방법론 역시 선구적인 면모를 보였다. 거시적인 통찰력과 어떤 현상의 근본 원인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것은 학문적 특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이었기에 일찍이 1950년대부터 척박한 우리 학계에 동양철학의 터전을 일구고 그 바탕 위에서 한국철학의 기반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그윽한 철학의 숲에서 미수(米壽)를 맞으셨다. 내게는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보이고 뚫을수록 굳게만 보이는’ 영원한 스승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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