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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상고심사부, 재판 받을 권리 침해 우려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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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법원이 사법제도 개선안을 연일 내놓고 있다. 어제는 법조경력자를 판사로 임용하는 법조일원화 등을, 그제는 고등법원 상고(上告)심사부 신설 등을 발표했다. ‘편향·이념·기교 판결’로 촉발된 국민들의 사법 불신 사태를 치유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대법원안(案)은 사법부 대개혁을 기대하는 국민적 요구와는 거리가 있다고 본다.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변혁을 주장하는 여론과 정치권에 떠밀려 자기방어용으로 급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대법원안의 핵심 쟁점은 1, 2심 재판에 승복하지 못할 경우 고법의 심사를 거치도록 한 상고심사부 도입이다. 상고 남발을 막고, 대법관에게 몰리는 사건 폭주를 줄여 심도 있는 심의를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최고법원으로서 대법원 위상과 그에 걸맞게 대법관 수를 억제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 반면 한나라당은 현재 14명인 대법관을 24명으로 증원하자고 한다.

국민들 사이에선 사실심(1, 2심)에서 결론이 나도 어지간하면 대법원 판단을 구하는 게 일반화돼 있다. 상고심사부는 이런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또 상고심사부 결정에 불복해 대법원에 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탓에 재판 기간과 비용만 늘어날 수도 있다. 결국 ‘4심제’의 옥상옥(屋上屋) 기구가 될 우려가 있는 셈이다. 게다가 상고심사부는 1980년대 시행됐다 국민의 재판청구권 차단 논란으로 폐지됐던 ‘상고허가제’를 연상시켜 과거로 회귀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사실 대법원은 과거와 달리 사형제·간통제 폐지 논란 등 국가의 큰 틀과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법원의 기능을 헌법재판소에 많이 넘겨준 상태다. 오히려 시민들의 재산과 권리를 판단해 주는 권리구제형 법원의 성격이 더 강해지고 있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국민이 원한다면 대법원 판단을 받게 하는 게 법치주의의 정신이 아닐까.

대법원안에는 법관인사위원회의 외부 인사 참여 확대에 대해선 아예 언급조차 없다. 10년에 한 번 있는 법관 재임용 심사 때 기준을 엄격히 하겠다는 추상적인 내용만 있어 아쉽다. 인사권은 대법원장의 고유 권한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하급심의 널뛰기 판결을 차단하기 위한 양형 기준법 제정도 재판의 독립성이라는 명분 아래 묻혀버렸다. 다만 법조일원화 실시와 1, 2심과 대법원 판결문 전면 공개, 법관윤리장전 제정 등 스스로 개혁하려고 노력한 점은 평가할 만하다.

과거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사법개혁이 추진됐으나 사법부의 저항에 말려 번번이 실패했던 경험이 있다. 또한 대통령 탄핵 등 정치문제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면서 ‘사법의 정치화’ 논란도 빚었다. 그렇다고 이번 사법개혁이 정치권력이 사법부를 길들이는 식의 ‘정치의 사법화’로 치달아서도 결코 안 된다.

사법부 독립만 외치던 대법원은 국회 사법개혁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정치권과 대법원은 정치적 계산과 법원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국민을 위한 진정한 사법개혁에 지혜와 역량을 모아야 한다. 미완의 사법개혁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