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미 단독주의의 오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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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월터 리프먼 이후 미국의 가장 탁월한 언론인.칼럼니스트라는 평판을 듣는 윌리엄 파프는 『미개인들의 감정』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냉전이 끝난 뒤 워싱턴에서는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민주국가들의 동맹을 추구하는 자칭 윌슨 자유주의자들과, 미국이 국제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리더십과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단독주의적 신보수주의자들이 손을 잡았다. "

윌슨주의라고 하는 것은 대외정책의 목표가 미국의 경제적.현실적 국가이익을 추구할 뿐 아니라 서양(미국) 민주주의의 가치관을 전세계에 확산하고 다른 민주국가들과 동맹.연합관계를 맺는 것이라야 한다는 노선이다.

단독주의는 유엔이나 우방들과 협력하여 국제분쟁에 개입하는 게 아니라 미국의 독자적인 결정으로 미국의 패권을 유지.강화하는 힘의 외교를 말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내전(內戰)으로 거의 전국민이 기아상태에 빠진 소말리아에 미군 3천명을 포함한 유엔 다국적군을 파견하면서 그것을 '과감한 다자주의' 라고 불렀다.

그러나 소말리아 무장세력의 공격으로 미군 17명이 죽어 길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전세계의 텔레비전에 방영되자 클린턴은 미군을 즉각 철수했다. 거기서 단독주의(unilateralism)가 다자주의를 대신했다.

미국 신보수주의 진영의 간판 지식인 어빙 크리스톨이 지난해 봄호의 포린 어페어스에 쓴 글이 미국의 단독주의를 가장 적절히 반영한 발언으로 자주 인용된다.

"오늘의 국제정치는 힘의 균형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 크리스톨은 오늘의 국제환경이 비교적 양호한 것은 미국의 패권주의 덕택이라고 전제하고, 그래서 미국의 패권주의는 적극적으로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미국외교가 이기적인 국가이익 보다는 높은 도덕성으로 뒷받침되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믿거나 말거나다.

부시행정부의 미사일방어망 추진방식이야말로 전형적인 오만한 단독주의다. 부시행정부는 냉전이 끝난 지금 미국과 우방을 위협하는 것은 러시아 같은 강대국의 핵미사일이 아니라 북한.이라크.이란 같은 불량국가들의 작은 규모의 미사일과 테러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육.해.공 3차원의 미사일방어망(MD)으로 미국과 우방을 적대국의 미사일공격에서 방어하는 야심적인 전략을 세우고, 그것을 우방들에 세일한다.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도 그래서 서울에 왔었다. 아미티지는 자신이 한국정부에 지지를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전략을 설명하러 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관리들의 방문을 받은 나라 정부들은 그들의 '설명' 을 지지와 참여 요청으로 이해한다. 그런 기미를 알아차린 뉴욕 타임스의 보수적인 칼럼니스트 윌리엄 새파이어는 미국의 단독주의를 '협의하는 단독주의' 라고 부른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독주의나 다자주의라는 정의(定義)가 아니라 부시행정부를 지탱하는 신보수주의 지식인들의 이른바 불랑국가들에 대한 융통성 없는 인식이다. 가령 크리스톨은 북한 같은 나라에는 당근으로 대략살상무기의 비확산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에 정권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미티지는 미국이 북한의 정권을 바꾸고 지도부를 전복하는 데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물론 북한이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남한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미티지와 크리스톨의 입장에는 큰 차이가 있다.

미국의 신보수주의 진영 안에서도 북한 정권은 무너뜨리는 게 상책이라는 크리스톨들의 패권적 단독주의와, 페리보고서의 권고대로 있는 그대로의 북한과 대화를 하자는 아미티지들의 입장이 달라 한국의 햇볕정책의 장래가 더욱 불투명하다.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그 중간쯤에서 확정된다고 해도 북한은 미국한테서 미사일을 포기하라는 강도 높은 압력을 받을 것이다. 북한의 반응이 반발 쪽으로 나타날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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