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6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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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64. 美재무의 회동요청 회피

1988년 벽두 나는 클레이턴 야이터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만나 "4월 총선 때까지 쇠고기 시장 개방을 유예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고 요청하고, 이를 위해 조건부로 각서를 써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86년 5월 한국으로 날아와 미 통상법 301조를 들먹이며 쇠고기 수입 개방을 요구했던 인물이다.

내가 제시한 조건은 총선 때까지 각서에 대한 비밀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던 미국의 국내 여건상 비밀을 지킬 자신이 없노라고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이렇게 해서 각서 없이 총선 전까지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양해가 이루어졌다. 지금에 와서 보면 선문답 같은 얘기였다. 어떻게 보면 만화의 한 장면 같았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베이커 미 재무장관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이미 밝힌 대로 나는 87년 8월 그와 만나 그 해 말 대선 전까지 환율을 8백원대까지 내리기로 합의한 바 있었다. 그 때 대뜸 그러면 "대선 후엔 어떻게 하겠느냐" 고 물었던 그였다.

따라서 환율을 더 내리라고 요구할 것이 뻔했다. 더 뒤집어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만나지 않고 서둘러 귀국했다.

당시 일부 신문들이 내가 베이커를 못 만나고 돌아왔다고 썼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처음으로 밝히지만 나로서는 일부러 그를 피한 것이다.

귀국길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장남 준모 내외를 만났다. 미국 유학 중이던 아들은 당시 내가 반대해 국내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공직자로서 교통혼잡 등으로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들 내외는 단둘이 미국 관청에 가 결혼신고를 했다. 해외 출장길에 숙소인 호텔방으로 아들.며느리를 불러 몇 시간 함께 있었던 것도 신문의 가십거리가 됐다.

귀국 후 만난 최광수(崔侊洙) 외무장관은 내가 각서를 써 주고 올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는 "비밀이 안 지켜지면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어 써 주지 않았다" 고 설명했다.

귀국하고 나니 예상했던 대로 나라가 온통 떠들썩했다. 신문들은 '야이터와의 통상협상 타결 실패' 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한 신문은 심지어 빈 손으로 돌아온 나에 대해 '물에 빠진 생쥐 꼴' 이라고 썼다. 훗날 그 기사를 쓴 기자와 마주친 내가 웃으면서 악수를 청하자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뺐다.

총선 전 쇠고기 개방 유예에 대해 양해가 돼 있었지만 언론에 대고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론의 이같은 보도 경향에 대해서는 훗날 언론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움직임이 있었다고 들었다.

1월 29일자 중앙일보는 당시 미 정부와 업계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썼다.

'워싱턴의 미 통상 관계자들은 이제 한.미간의 협상이 논리적인 해결 단계를 지나 국가간의 신의에 이미 금이 가 있는 상태(credibility crisis)이므로 301조 발동이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소와 같은 물리적인 수단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굳혀 가고 있다. '

수입 개방은 부총리 한 사람이 날아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후로도 표면적으로는 쇠고기 등 한.미간 3대 통상현안에 대한 우리측 입장을 미국에 전달했고, 미 USTR는 USTR대로 쇠고기 문제를 GATT에 제소하기 위한 수순을 밟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다음 날인 1월 8일엔 축산업자들이 과천 정부 제2청사로 몰려와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내 차를 부순다고 경제기획원 직원 승용차 넉 대를 때려부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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