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일 관계 '김정남 쇼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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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 정부는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장남으로 추정되는 남자(30)의 체포 사건에 대해 매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언론은 이 남자가 김정남이라고 시인했다고 전했지만 정부 당국은 신원을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는 3일 밤 기자들의 질문에 "확인 중" 이라고 얼버무렸다. 정황상 김정남이 확실한 데도 그를 김정남이라고 확인해 줄 경우 북.일 관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의 '연막 치기' 는 김정남이 갖는 비중 때문이다. 김정남은 김정일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한명으로 알려진다. 최근에는 그가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

홍콩 시사 월간지 광각경(廣角鏡)은 지난달호에서 김정남이 현재 인민군 보위사령부의 요직을 맡고 있다고 전했다. 일본 공안 당국도 그렇게 보아 왔고, 조총련도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가와시마 유타카(川島裕)외무성 사무차관이 호텔에 있던 고이즈미 총리에게 김정남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체포를 긴급 보고한 데서 사건을 보는 일본측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김정남 체포는 북.일 관계에 악재가 될 수도, 호재가 될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내다본다. 열쇠는 일본이 쥐고 있다. 일본 정부가 '법대로' 를 고집하면 양국 관계는 더 꼬일 수 있다.

예컨대 그를 북한이나 북한과 국교를 맺고 있는 중국 등으로 추방하지 않고 출발지로 알려진 싱가포르로 보낼 경우 양국 관계 악화는 불보듯 뻔하다. 추방 시기도 변수다. 일본이 도미니카공화국 위조여권을 소지하게 된 경위와 불법 입국 경력 등을 꼬치꼬치 캐면 추방이 늦춰질 수 있다.

이럴 경우 지난해 말 이래 국교 정상화 교섭이 단절된 양국 관계는 더 어려워질 게 분명하다. 일본 정부가 그의 신원을 밝히지 않고 중국 추방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는 것은 이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사건은 양국 관계에 숨통을 틔게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양측은 이미 물밑 접촉을 가졌다고 공안 소식통은 전한다.

일본은 이 사건을 북.일 수교 협상 카드로 활용할 수도 있다. 사건을 정치적으로 처리해 생색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북한 경수로 건설 분담금으로 10억달러를 내고도 일본은 한반도 이해 당사국 가운데 유일하게 대북 관계에서 고립감을 느껴왔다.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외상이 취임 회견에서 북.일 관계 정상화에 의욕을 보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북한도 최근 들어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1972년에 일항기 요도호를 납치했던 일본인 2세 세명이 이달 말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일본과 마냥 등을 돌려서 얻을 게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일본 내 대북 강경 여론은 변수다. 북한의 일본인 납치 의혹 문제를 걸고 넘어져온 납치 피해자 가족 단체나 우익은 다른 불법 입국자와 같은 조사와 조치를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이는 정치적 해결을 시도할 것으로 보이는 일본 외무성의 입지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북.일 관계는 이 사건 처리 과정보다 미국의 대북 정책과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의 대북정책이 결정되는 여름께 북.일 관계의 윤곽도 드러날 전망이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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