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공천혁명 이번에도 물 건너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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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국 정치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범이 후진적인 공천제도다. 국회의원·시장·지방의원 등은 국민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이들의 공천과정에 일반 시민·당원의 의사가 중요하게 반영되어야 한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비(非)당원 국민도 참여하는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나 대의원 경선 같은 제도로 공천을 정한다. 이 같은 개방형·상향식 공천이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이며 한국도 이를 도입해야 한다는 게 중론으로 되어 있다. 2년 전 한나라당의 18대 총선파동은 밀실형·하향식 공천이 낳은 대표적인 부작용이었다. 권력 주류가 불공정하게 공천권을 휘두른 것이다. 공천파동의 후유증은 지금도 심각한 상태라 공천혁명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공천혁명은 물 건너가고 있다. 우선 기초단체장·의원의 정당공천을 폐지하자는 여론이 비등했으나 여야는 기존 제도로 지방선거에 돌입하고 있다. 지역구 의원들이 공천권이라는 꿀 같은 기득권을 버릴 생각이 없는 것이다. 여야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민의 공천참여도 최대한 봉쇄하고 있다.

한나라당은 사상 처음으로 국민공천배심원단을 도입한다고 하나 기능은 유명무실하다. 배심원단이 후보를 뽑는 게 아니라 시·도당 공천심사위가 뽑은 후보에 대해 적격 여부만 가리는 것이다. 그러니 권력은 여전히 공천심사위와 지역구 의원에게 몰려 있다. 심사위 구성을 놓고 계파갈등이 심하고 의원들이 서로 자기 사람을 공천하려고 대립하는 지역구가 적지 않다. 의원들로서는 우호적인 인사가 당선돼야 선거 때 도움을 받고 그들을 통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천을 노리는 기초선거 후보자들로부터 의원들이 금품을 받을 비리의 소지도 적지 않다.

한나라당에 비해 민주당은 시민의 공천심사참여를 넓힌 게 사실이다. 민주당이 도입한 시민공천배심원단은 광역선거구 2곳(광주·대전)과 8개 기초자치단체 선거구에서 중앙당이 압축한 복수의 후보 중에서 공천후보를 직접 뽑는다. 특히 광주라는 상징적인 텃밭에 개방형 경쟁을 도입한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역시 호남·수도권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초선거구에서 시민참여가 배제됨으로써 민주당의 공천개혁은 ‘찻잔 속의 미동(微動)’에 그치고 있다. 2002년 대선 때 민주당은 국민참여경선제를 도입함으로써 정당의 공천개혁을 선도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후 두 차례 총선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당의 공천은 많은 경우 정권 실세들과 국회의원의 이권(利權) 놀음으로 전락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공천에 목이 매여 의정활동이나 국회투표에서 소신에 제약을 받는다. 기초단체장·의원들도 공천에 목이 매여 당의 실세나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밀실형 공천제도에 막혀 능력 있고 참신한 새 피가 정치권에 수혈되지 못한다. 공천제도의 혁명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당면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