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미·일의 우경화와 한국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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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부시 행정부 출범 1백일을 사흘 앞둔 어제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내각이 출범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집권으로 일본의 우경화(右傾化) 우려가 더욱 커지고 있는 가운데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중국의 대만 침공 때 무력 개입할 가능성을 시인했다.

1979년 대만관계법 통과 이후 유지해 온 '전략적 모호성' 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발언이다. 미 공화당 정부의 일본 우선정책에 화답하듯 고이즈미 총리는 미.일 중심축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힘의 외교' 를 표방한 부시 행정부의 보수.강경 노선과 일본의 보수.우익 노선이 양 날개를 이루면서 동아시아를 압박하는 형국이다.

부시 행정부 등장으로 탄력을 받은 일본의 우경화는 미.중, 중.일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중국과의 정찰기 사건이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은 잠수함과 구축함 등 민감한 품목의 무기를 대만에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은 중국의 반대를 무시하고 리덩후이(李登輝)전 대만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했다. 역사 교과서.집단 자위권.헌법 개정.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등 과거의 군국주의를 연상시키는 행보에도 거침이 없다. 통상 분야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이례적으로 중국산 세개 농산물에 대해 세이프가드를 발동했다. 자국 이기주의니 신(新)내셔널리즘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상황이다.

미.일의 동반 보수.우경화로 한반도에도 한랭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 노선으로 DJ의 '햇볕정책' 이 힘을 잃고 있고, 남북 접촉 중단 사태가 장기화하고 있다.

4자 회담과 함께 한.미.일 3국 공조의 장래도 불투명하다. 남북 화해와 협력을 통한 한반도 평화정착이라는 민족적 대명제와 밀려오는 미.일 연대의 먹구름 사이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미.일 대(對) 중.러의 대립구도가 가시화할 경우 우리의 입지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있는 것인가. 가쓰라와 태프트가 밀약을 맺던 구한말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정부의 냉철한 상황 인식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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