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미스터리] 8. 성인병 앓는 우리집 강아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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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일곱살 된 흰색 페키니스종 애완견이 한 동물병원에서 갑자기 죽었다. '예삐'라는 이름을 가진 이 개의 죽을 당시 체중은 3.5㎏. 또래보다 매우 마른 상태였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평소 잦은 기침 등 호흡 장애를 보였고, 죽기 몇 달 전부터 식욕을 잃고 방 한쪽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기 일쑤였다고 한다. 수의사인 윤신근 한국동물보호연구회장이 예삐의 폐를 열어 보니 녹두알 같은 암세포 덩어리가 만져졌다. 자연적으로 개가 폐암에 걸리는 사례는 드물다. 예삐에게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난 걸까.

예삐의 주인은 20대 후반의 남자였다. 그는 하루에 담배 한갑 이상을 피우는 골초였다고 한다. 윤신근 회장은 "소형아파트 같이 좁고 밀폐된 공간에서 골초인 주인과 오래 지내다보니 간접 흡연을 한 예삐가 폐암에 걸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미국 역학회지에는 골초 주인 탓에 폐암에 걸린 100여 마리 개들의 '억울한' 사연이 소개됐다. 대개 5~7년 간접 흡연에 시달린 개들이었다. 사람은 보통 20년 이상 흡연했을 때 폐암이 나타난다. 주인이 불치병에 걸리기에 앞서 먼저 담배를 끊으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코가 긴 개가 폐암에 덜 걸린다는 것이다. 이 연구를 수행한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존 레이프 교수는 논문에서 "담배의 유해물질이 긴 코를 통과하는 동안 거의 걸러지고 일부만 폐에 도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폐암뿐만 아니라 당뇨병.고혈압.심장병.뇌졸중.골다공증 같은 성인병이 개에게도 자주 나타난다."

서울대 수의대 황철용 교수의 설명이다. '성견병(成犬病)'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 동물병원에 따르면 내분비계 성견병(주로 당뇨병) 치료건수는 2000년 273건에서 2003년 390건으로 늘었다. 소아 당뇨가 많아지는 것처럼 당뇨병을 앓는 강아지도 급증하고 있다.

대부분의 성견병은 성인병과 발생 양상이 비슷하다. 잘못된 식생활 습관이 원인이 되곤 한다. 개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감미료까지 첨가한 값비싼 고단백.고지방 사료와 주인이 무심코 주는 먹이가 개의 체중을 한껏 불려놓는다. 그러면서도 운동량은 매우 적다. 아파트 생활을 하는 개가 증가하면서 동구 밖까지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과거의 개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덜 움직인다.

25일 서울에서 열린 13차 아시아.태평양 수의사총회에 참석한 미국의 애비 데시무크 박사(네슬레푸리나 연구소)는 "다 자란 개의 20%가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다"며 "개가 다이어트를 해서 살을 빼면 관절염 발생률이 낮아지고 증상이 가벼워진다"고 밝혔다.

관절염에 처음 걸리는 시기도 마구 먹은 개(평균 10.3세)는 소식(小食)한 개(평균 13.3세)보다 3년이나 빨랐다.

도시의 삭막한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성견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경북대 수의대 엄기동 교수는 "개는 방 안에 혼자 남겨지는 것을 가장 참기 힘든 스트레스로 여긴다"면서 "주인이 출근.등교하면 혼자 남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출입구.창문 등에 대.소변을 남기는 등 마구잡이 행동을 한다"고 말했다. 집안이나 마당에 묶여 지내는 개도 성견병을 앓기 십상이다. 스트레스가 면역기능을 떨어뜨려 각종 질환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주인 잘못 만난 죄, 도시에 태어난 죄로 몹쓸 병에 시달리는 애완견들. 키우는 강아지가 아플 때 자신의 건강도 점검해 보자. 역시 개는 여러 모로 인간에 유익한 동물이다.

박태균 식품의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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