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배 칼럼] 김정일 안오나 못오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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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정일(金正日)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 가능성이 점점 안개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연초엔 상반기 방문을 시사했던 김대중 대통령도 방문 시기를 흐리고 있다. 여권 내 사정을 모를 리 없는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도 金위원장이 서울에 와도 "주고받을 게 별로 없을 것" 이라고 예고했다.

*** "와서 주고받을 게 업어"

金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갑자기 어려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무슨 복잡한 사정이 생긴 것인가. 정부측은 이를 은근히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 탓으로 돌린다. 항간에는 金위원장의 방문 조건 때문이라는 설(說)도 있다.

세계의회연맹 총회에 참석했던 북측 대표는 金위원장의 답방시기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재규(朴在圭)장관에게 물어보시오" 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이 말인즉 朴장관에게 金위원장의 방문 조건이 전달됐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그 조건은 무엇일까. 일각에서는 보안법 개정 또는 서울시민의 환영동원 등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결정적 조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북측은 김대중 정부에 정상회담 성사 때 했던 약속의 이행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남북 정상회담 직전 발표된 베를린선언은 도로.항만.철도.전력.통신 등 사회 인프라 건설과 농업 기반시설 등 대대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정부가 실제로 지원한 것이라곤 비료 및 쌀.옥수수 수십만t에 불과했다.

인프라 건설이나 농업 기반 조성과 같은 장기투자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이 독자적으로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됐던 전력지원도 지지부진하다. 북측은 2백만㎾(이 숫자는 어디서 밀약한 것일까)가 안되면 우선 50만㎾라도 주고 화력발전소 몇개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퍼주기' 시비에 휘말린 이 정부는 남북 전력체계상의 차이나 송배전시설의 낙후 등 기술적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하고 있다. 미국의 배후 견제설도 있다.

개성공단 건설 사업이니, 남북 정보기술(IT)공동사업이니 하지만 그 전망도 불투명하다. 북측은 평양 근교에 1백만평의 정보산업단지를 제공했다.

그러나 펜티엄급 컴퓨터도 전략 물자로 분류돼 북측에 가져갈 수 없는 상황에서 북측과 어떻게 소프트웨어산업을 일으키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개성공단에 입주신청을 했다는 부산.대구의 신발.섬유 제조업체가 4백80개나 된다고 하지만 이 사업의 진행을 맡은 토개공측은 공단조성의 경우 실입주율이 5%도 안된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다.

현대에 대해 정부가 무슨 까닭으로 퍼주기식 지원을 하는지 모르지만 많은 업체들은 북한 투자의 경제성보다는 역시 '현대식' 정치지원에 더 기대를 걸고 있는 눈치다.

아무튼 북측 입장에서 보면 김대중 정부가 약속 위반을 한 셈이다. 북측이 경의선 철도 건설을 위한 실무협정에 사인하지 않았다고 탓할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러다간 정부의 햇볕정책이 북으로부터도 불신당할 염려가 없지 않다.

최근 金위원장이 러시아 방문을 미루고 있는 것이 러시아의 지원이 시원찮기 때문이라는 말이 들린다.

그것이 무기인지, 경협자금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북측은 허황한 실크로드 같은 구호가 아니라 확실하고 구체적인 지원을 요구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만약 金위원장이 서울에 와서 주고받을 게 별로 없다면, 낮은 단계니 높은 단계니 하는 연방제나 천명할 '서울평화선언' 을 하려 답방한다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 실제적 상호지원 협의를

정상회담의 화려한 쇼도, 노벨상의 이벤트도 이젠 모두 끝났다. 남북의 두 정부 모두 현실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북측은 설령 남북 정상회담 준비 접촉 과정에서 어떤 밀약(密約)이 있었더라도 그것이 이행되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남측도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대북 지원의 장기적 청사진을 만들어 내는 것을 정책적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전제조건 없는 햇볕정책은 환상적 통일론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민족을 내세운 좌파적 통일지상주의의 환영(幻影)을 쫓다간 대북 포용정책마저 무너져내릴지 모른다.

남북이 허황된 쇼가 아닌 실제적인 상호지원 방안을 새로 협의하고, 남북 당국이 한반도의 평화체제 수립을 주도적으로 협의하기 시작하고, 그럼으로 인해 신뢰성을 쌓아가는 것이 우리의 대북 정책의 전제이자, 金위원장 답방의 조건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김영배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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