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이 월북했다는데 북한, 왜 조용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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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읍 대마리 군사분계선 철책은 과연 민간인이 월북하기 위해 절단한 것인가. 군 당국의 '민간인 월북'이란 잠정 결론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민간인이라면 중국 등을 통한 손쉬운 입북 경로를 택하지 않고 왜 지뢰밭을 거쳐 갔겠는가다.

군은 철책 절단이 전문 침투교육을 받지 않은 인물의 소행이라고 밝혔지만 전문 요원이 아니라면 철책 접근과 절단, 그리고 지뢰밭 관통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지적도 많다. 군은 27일부터 대대적인 '월북자' 신원 파악 작업에 들어갔다. 합동참모본부는 월북자가 3~4일 전 이미 민통선 안으로 들어와 철책 후방 지역에 숨어 초병들의 근무 상태를 관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또 월북자가 이 지역을 잘 아는 사람일 것으로 보고 이 부대 출신 전역자와 철원군.연천군 주민, 민통선 출입자 중 의심스러운 사람이 없는지 조사 중이다.

◆철저히 준비된 접근?=민간인이 철책에 접근하기는 매우 까다롭고 복잡하다. 해당 지역의 지형과 도로는 물론 경계를 맡고 있는 군 부대의 근무 형태에 관한 정보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공작원 수준의 면밀한 정보수집과 사전 조사가 필수적이다. 군사시설이 집중돼 있는 전방 지역에는 민간인통제구역이 설치돼 있다. 외부인이 민통선 내의 도로망과 부대 위치를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민통선 출입 때 해당 주민들은 신분증으로 들어가지만 외부인은 출입 허가를 받는다. 또 당일 해지기 전에 나와야 한다. 군 관계자는 이 때문에 월북자는 민통선 초소를 우회해 잠입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 역시 해당 지역의 지형지물과 이동로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치밀한 준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과감한 절단과 지뢰밭 통과?=철책에 접근하려면 '열쇠부대'의 경계병을 피해야 한다. 초병들은 조를 짜서 30분 이내 간격으로 철책을 지나간다. 따라서 이번 월북자는 30분 안에 모든 것을 해치워야 했다. 야간에 철책 후방에 잠복해 있다가 초병이 지나간 틈을 타서 철책으로 다가가 이중철책과 윤형철조망, 여기서 1.2㎞ 북쪽에 있는 비무장지대(DMZ) 내 추진철책 등을 모두 절단하고, 군사분계선 너머로 이동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고도의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면 무리인 것이다. 합참 관계자는 4개의 철책을 절단하는 데만 10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전방 초소에는 적외선을 이용해 야간에 수㎞ 이내의 사람이나 동물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열상장비(TOD)가 설치돼 있다. 그런데도 이번엔 TOD에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이 지역을 자세히 알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민통선 북쪽 지역과 DMZ는 도처가 지뢰밭이다. 사건 현장인 대마리에선 1997년 5월 주민 한 명이 지뢰로 발목이 절단됐다. 지뢰 지대에 익숙한 주민들까지 지뢰에 다치는 지역을 민간인이 월북로로 택했다는 주장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또 25일 밤과 26일 새벽엔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는 입북자가 지뢰 없는 길을 미리 파악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단순한 민간인의 소행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민간인으로 위장 절단?=군 당국은 끊어낸 철조망 부위가 'ㅁ'모양인 점을 강조한다. 남파 요원들은 'ㄷ'이나 'ㄴ'으로 끊어낸다. 절단하는 시간이 덜 걸리기도 하지만 절단 부분을 완전히 떼지 않고 철책에 일부 붙여놔야 침투를 은폐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한다.

하지만 북한 요원이 민간인 월북을 가장해 서투르게 절단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입북자가 잘린 철책을 '은폐'하려 했다는 점에서 침착성을 엿볼 수 있는데 민간인이라면 과연 그처럼 급박한 상황에서 '은폐'까지 생각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북한은 왜 가만 있나=관례적으로 남측 민간인이 월북하면 북한은 즉각 방송을 통해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 북한은 조용하다. 또 북한군에선 지난 25일 밤부터 26일 오전 1시 사이에 경고 방송이나 경고 사격 같은 것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민간인의 월북이 포착됐다면 북한군에도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당시 북한 초소도 뚫렸다면 지금쯤은 북한군 움직임도 부산할 텐데 그들의 특이한 동향은 아직도 포착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월북자가 일반적인 민간인이라는 군 당국의 결론엔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합참이 28일 민간인 대신 신원 불상(미확인)의 월북자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의문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군 당국은 "북한은 우리 측 발표와 대응을 지켜본 뒤 입장을 표명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군으로선 이젠 북한의 입만 바라보는 형국이 됐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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