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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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40. 직장없는 설움

이렇게 각 지점이 자체적으로 발굴해 낸 유망 중소기업엔 '외환은행 지정 유망 중소기업' 이라는 마크를 달아 주었다. 지금은 널리 보급된 인큐베이터 제도가 생소했을 때 같은 취지의 제도를 앞서 운용했던 셈이다.

이 제도 덕에 은행 대표로 청와대에 들어가 중소기업 육성 성공사례 보고를 하자 "외환은행이 어떻게 중기 육성에 앞장서게 됐느냐" 는 말을 듣기도 했다.

호남지역 업무추진본부 등을 만들어 그 지역에서 조성한 자금은 전액 그 지역의 기업을 위해 쓰도록 한 것은 일종의 세일링 포인트였다.

당시엔 각 지점에 들어온 예금의 일부를 본점에서 관리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돼 있었다. 지방에서 예금을 받아 서울에서 쓴 것이다.

1984년 5월 호남본부 현판식에 참석한 나는 "호남본부 산하 지점들에서 받은 예금은 1백% 호남지역에 환류되도록 하겠다" 고 말했다.

품질관리(QC) 활동도 활발히 벌였다.

나는 자발적인 QC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그 활동의 실질적인 혜택이 당사자들에게 돌아가도록 신경 썼다. 절감된 경비로 책임자 수당을 새로 만들어 지급했는가 하면 '마감 빨리 하기 운동' 으로 일이 빨리 끝나면 일찌감치 귀가하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남자 행원들은 일과 후 취미 생활을 하고 여행원들은 야간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나는 또 행장으로서 내가 한 지시에 대해 일일이 고유번호를 매기고 처리 결과를 수시로 보고하도록 했다. 1년 반 남짓한 재임 기간의 지시사항은 2백건에 달했다. '조달자금의 지역환원제' 실시와 관련한 84년 1월 4일자 지시는 당시 은행장 지시사항 처리상황 일지에 이렇게 기록됐다.

'새해부터는 지역별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안의 일환으로 특정 지역에서 조달한 자금은 해당 지역 거래선에 여신 지원의 형식으로 환원하는 정책을 적극 추진하도록. 제1단계로 호남.충청.강원.제주 지역에서 조달한 자금은 그 지역의 유망 중소기업에 여신 지원으로 환원하도록 실시. '

당시 외형 위주의 과당 경쟁을 벌였다면 나는 은행가로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순진한' 공무원 출신이 뛰어들기엔 판이 너무 어지러웠다.

다행스럽게도 과당 경쟁이 낳은 폐해로 은행들은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내실 경영이 불가피했다. 결과적으로 그 방향으로 나간 것이 주효했던 셈이다.

외환은행장 시절 나는 임원들이 퇴임을 하면 이임식을 마친 뒤 직원들과 현관에 나가 줄을 서 배웅을 했다. 그렇게 한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다.

83년 7월 23년의 공무원 생활을 접고 경제기획원 차관 이임식을 한 바로 그 날 나는 외환은행장에 취임했다. 오전엔 이임식, 오후 2시엔 취임식이 열렸다. 기껏해야 세 시간이나 될까, 막상 옷을 벗고 나니 취임식에 참석할 때까지의 자투리 시간을 보낼 데가 마땅치 않았다. 취임식이 곧 있으니 귀가를 할 수도 없었다. 막바로 갈 자리가 마련돼 있는 데도 왠지 허전했다.

'옷 벗고 난 직장 없는 설움이 바로 이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임하는 정춘택(鄭春澤) 외환은행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임원들과 점심을 하기로 했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은행감독원장으로 옮기는 鄭행장은 재무부 외환국장을 지냈고 나는 그 밑에서 국제금융과장을 했었다. 그가 주미 재무관을 할 때 나는 주영 재무관이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임원들과 점심을 먹고 난 우리는 나란히 이취임식에 참석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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