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손놓고 있는 동안 ‘제 2 의 조두순’ 돌아다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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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전 부산의 지역구(북-강서갑)로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 한나라당 박민식 의원은 기내에서 강희락 경찰청장과 마주쳤다. 강 청장은 ‘부산 여중생 살해 사건’의 현장을 찾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사고 발생지가 지역구 인근인 박 의원은 강 청장과 사건에 대해 얘기를 나눴고, 8일엔 여중생 이모양의 빈소를 다녀왔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2008년 9월 자신이 발의한 ‘상습적 아동 성폭력범의 예방 및 치료에 관한 법률안’(일명 ‘화학적 거세법안’)에 대해 얘기했다. 법안은 13세 미만 아동을 대상으로 상습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성도착증 환자에게 주기적으로 화학적 호르몬을 투입해 일정 기간 성적 욕구를 감소시키도록 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이 법안은 지난해 말 한나라당과 정부가 반드시 처리할 안건으로 선정했지만 아직까지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이다. 박 의원은 “성폭력 법안을 다루는 데 법사위가 너무 보수적일 뿐 아니라 가해자의 인권을 너무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며 “850만 아동의 상황이 절박한데도 의원들은 그 절박함을 못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여중생 사망 사건 이후 국회가 아동 성폭력 관련 법안들을 늑장 처리하고 있는 데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2008년 ‘혜진·예슬양 사건’과 지난해 ‘조두순 사건’ 확정 판결 직후 성폭력을 엄중히 다스리자는 내용의 법안이 우후죽순 쏟아졌지만 정작 국회에선 제대로 처리되지 않아 “국회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조두순 사건 확정 판결 직후 여야 의원들이 제출한 아동 성폭력 관련 법안은 20여 건에 이르렀다.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과 민주당 최영희 의원 등이 ▶13세 미만 아동에 대한 성폭력 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성인이 될 때까지 공소시효 정지 ▶성폭력 범죄 전담 재판부 지정 ▶음주·약물 상태 성폭력 범죄 가중 처벌 등의 내용이 담긴 ‘성폭력 처벌법’ 및 ‘청소년 성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한나라당은 ‘조두순 사건’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고려해 지난해 12월 국회 직전 “18대 국회 들어 제출된 성폭력 관련 법안 41개를 반드시 통과시키겠다”고 약속하고 관련 법안들을 11개로 정리했다. 그러나 국회에서 통과된 관련 법안은 정부가 조두순 사건 이전에 발의한 ‘DNA 신원 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하나뿐이었다. 조두순 사건 이후 제출된 20여 개 법안은 모두 통과되지 않고 계류 중이다.

법안을 제출한 의원들은 법사위가 너무 소극적이라고 비판한다. 한나라당 신상진 제5 정조위원장은 “법사위원들은 현실은 외면한 채 너무 보수적으로, 또 법률적으로만 접근하려 한다”며 “법안이 관련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더라도 법사위가 발목을 잡으면 계류되는 관행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영희 의원은 “법무부와 법사위는 무슨 사건만 나면 금방 처리할 것처럼 난리를 치다가도 정작 논의에 들어가면 ‘형법에서 다룰 문제’라는 식으로 넘어가더라”며 “국회는 근본적으로 부모와 아이들의 불안감을 없애는 방향의 입법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수희 의원은 “법사위가 정치 논리에만 매몰되다 보니 진짜 민생문제는 외면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법사위 한나라당 간사인 장윤석 의원은 “제출된 법안의 상당수는 법정형을 가중하자는 것이나 그걸 살펴보면 현행 형법으로도 충분히 중형을 선고할 수 있는 것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양형 문제이기 때문에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모든 것을 검토해 4월 중에는 (성폭력 관련) 입법 문제를 마무리 짓겠다”고 밝혔다.

이가영·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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