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장 이색모임] 고창 '필리핀 주부 모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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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우리끼리 모여 남편들 흉도 보고, 한국 요리.말.노래도 배우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려요. 고국에 계신 부모님 보고 싶은 생각 같은 게 모두 사라지지요. "

이역만리의 필리핀에서 낯 설고 물 설은 고창군의 농촌으로 시집 온 여성들이 매월 한차례씩 만나 남편의 나라를 공부하며 향수를 달래고 있다.

이 모임의 회원은 만지(30).징겔(28).넬리아(24).밀드레드(28).데레사(36).아니따(36).마릴리(29).밍(36).놀데스(31).마레페(29)씨 등 35명.

거의 다 고창군 신림면.상하면 일대에 흩어져 사는 필리핀 여성들이다. 5년전부터 모 종교단체의 주선으로 이 지역 농촌총각들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있다.

회장이 없는 게 이들 모임의 특징. 매월 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회원이 회장 역할을 한다.

매월 세째주 수요일 모이는데, 장소는 대개 회원들의 집이다. 모임은 우리말이 아닌 영어를 쓴다는 점을 빼고는 한국 여성들의 만남과 다를 게 없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 하기와 남편.시어머니 등 가족들에 대한 애교스런 불만들. 회원들이 다 모이면 한국요리를 배우는 것으로부터 공식 모임을 시작한다.

요리강사는 장소를 제공한 집의 시어머니 또는 시누이 등이 맡는다. 된장찌개.김치찌개 끓이는 방법과 불고기 요리법, 김치 담그는 법 등을 주로 배운다. 3년 전 시집 온 데레사(36)씨는 "한국음식 요리법을 다 배운 것 같은데 혼자 해 보면 제 맛이 나지 않는다" 고 말했다.

요리가 끝나면 한국말을 공부한다. 선생님은 따로 없고, 회원들이 각자 남편한테 배운 말들을 자랑하면 발음 등을 서로 교정해 주면서 함께 배운다.

한국말 공부 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속담. 모임 때마다 속담 한 개씩을 공부한다. 또 모임 때마다 한국 노래를 배운다. 회원들 사이에 가장 인기있는 곡은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다.

네리아(24)씨는 "노래를 부를 때 가장 즐겁고 한국말이 머리 속에 쏙쏙 들어 온다" 며 "남편이나 시댁 식구들과 함께 가끔 노래방에 가 배운 노래를 부른다" 고 말했다.

파란 눈에 까무잡잡한 피부 등 생김새는 다르지만 이들은 어느새 평범한 한국의 아내.며느리로 바뀌었다.

글.사진〓서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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