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아프간 불상과 반구대 암각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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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도대체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인 탈레반 정권의 민병대가 탱크와 로켓 포탄을 동원해 바미안 절벽에 새겨진 세계 최대 규모의 마애석불들을 파괴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풍화와 공해에 무너져내리는 많은 문화유적들을 보존하기 위해 지구촌 전체가 시간과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판에 이 무슨 무지몽매한 문화 재앙이란 말인가.

*** 대표적 한국 선사유적지

바미안 석불들은 2세기께 서북 인도의 카불강 하류 평원지대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인도 쿠샨 왕조가 꽃피운 간다라 불교미술의 걸작품이다. 지금은 비록 아프가니스탄 영토에 포함돼 있지만 그 유적들은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다.

적어도 주변 불교국가들에는 함께 공유할 권리가 있는 역사적인 유물이다. 탈레반 정권엔 잠시 관리할 의무가 있을 뿐 함부로 파괴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과 마쓰우라 고이치로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간곡한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돌덩이를 부수는 것인데 왜 이리 소란이냐" 며 강행하고 있다.

태국.네팔.스리랑카 등 주변 불교국가들과 유럽연합(EU) 국가들은 물론 같은 이슬람 국가인 이란과 파키스탄도 성명을 통해 즉각적인 중단을 요청했다. 마침내 우리 정부도 규탄 대열에 정식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바로 턱 밑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질 즈음에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다. 이런 걸 두고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울산시는 2001년 한국 방문의 해와 2002년 월드컵대회를 겨냥해 울주군 태화강 상류의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서석 주변 지역을 선사유적공원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탈레반 정권과 울산시를 어떻게 나란히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만 상황이 흡사한 걸 어찌하랴.

울주군의 암각화는 한국의 대표적인 선사유적이다. 지금은 비록 행정구역상 울산시에 속해 있지만 우리 민족 전체의 문화유산이다. 나는 얼마 전 출간한 수필집에 암각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울산대 김홍명 교수의 그림을 삽화로 사용했다.

새끼를 등에 업고 물 위로 떠오르는 어미 고래의 모습에 누구나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고 느낄 것이다. 울산시에는 잠시 관리할 의무가 있을 뿐 나와 우리 모두에게 물려진 유산을 함부로 훼손할 수 있는 자격은 없다.

그동안 한국암각화학회를 비롯한 9개 관련 학회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문화애호가들의 탄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울산시는 1백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대규모 주차시설을 갖춘 전시관과 원시문화 산책로를 건설할 계획이다.

또 많은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진입 협곡을 뚫어 너비 3.5m의 도로를 8m로 확장할 참이다. 1998년 월드컵의 주최국이었고 암각화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기존의 도로마저 폐쇄했던 프랑스 관광객들의 비웃음을 면치 못할 치욕적인 관광상품이 될 것이다.

로켓포가 터지고 탱크에 짓밟히는 아프가니스탄과 다이너마이트와 불도저에 유린될 울주군이 무에 그리 다를까 의심스럽다. 아프간의 불상파괴가 겉으로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우상숭배를 막으려는 것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유엔의 제재조치를 풀어보려는 경제전략이라는 진단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울산시도 결국 경제적 이득에 눈이 먼 것 같아 서글프다.

*** 개발보다 보존사업 펼때

탈레반 정권이 결코 석불의 문화적 가치를 몰라서 저지르는 게 아닌 것처럼 울산시도 암각화 보존의 당위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리라.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암벽은 그렇지 않아도 65년 사연댐의 건설로 반복되는 침수와 노출에 의해 미래가 불투명한 상태에 있다. 울산대 박물관의 최근 연구보고에 따르면 서둘러 보존 계획을 세워도 모자랄 판이다.

할 수만 있다면 사연댐을 해체해서라도 이 소중한 유적을 살리고 싶은 심정인데 개발이라니 도대체 상상을 초월하는 발상이 아닌가.

울산을 사랑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더 늦기 전에 울산시가 70년대식 개발독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종합적인 학술조사를 실시하고 세심한 보존사업을 수행해 역사에 길이 남게 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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