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사설] 한·러 외교, 현실 직시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2박3일간의 방한 일정을 마치고 어제 베트남으로 떠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비행기 안에서 분명 만족스럽게 웃었을 것이다. '차르의 행차' 를 방불케 한 이번 방한으로 푸틴은 한반도 문제에 대한 러시아 몫의 존재를 내외에 과시하면서 외교.경제적으로도 실속을 챙기는 성과를 거뒀다.

특히 러시아가 미국의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 구축에 반대하는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는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조약의 유지.강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에 한국을 끌어들인 것은 누가 보더라도 외교적 성과로 보일 만하다.

러시아 언론은 물론이고 미.영 등 서방 언론들은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한국이 NMD 계획에 반대하는 러시아에 동조한 것으로 해석하면서 푸틴의 외교적 승리라고 보도하고 있다. 특히 미 언론은 한.미 정상회담을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한국이 러시아 편을 든 배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부는 완전한 오해라고 강조한다. ABM 제한조약과 관련해 그동안 여러 국제회의나 정상회담에서 채택된 공동성명의 '관용적 문구' 를 그대로 옮긴 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NMD와는 무관하다는 설명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조항을 공동성명에 굳이 포함시켜 과연 러시아로부터 얻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정부는 외교적 실수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햇볕정책에 대한 러시아의 확고한 지지 확보를 정부는 성과라고 내세우는 모양이지만 한반도에서 '양다리 외교' 를 추구하고 있는 러시아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문제다. 대미 일변도 외교에서 벗어날 필요성도 있지만 외교란 국익에 바탕을 둔 엄연한 현실이다.

NMD 문제에 대해서는 당분간 '전략적 모호성' (strategic ambiguity)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시 행정부 출범으로 가뜩이나 대북정책을 둘러싼 한.미간 갈등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외교적 미숙함이 빚은 오해 때문에 정부는 쓸데없이 미국측에 해명해야 할 또 하나의 새로운 부담만 안게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