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미국의 '경제 NMD'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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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로버트 졸릭, 하버드대 법대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아버지 부시 정권에서 국무차관을 역임한 그는 아들 부시 정부에서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임명됐다. 대표의 인품과는 무관하게 대표부의 고유 업무와 막강한 위력 때문에 그의 전임자들 대개가 우리한테 유쾌한 기억으로 간직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 부시 정부 경착륙 초조감

졸릭은 '포린 어페어스' 2000년 1~2월호에 클린턴 외교가 실패한 5대 요인을 지적한 뒤, 공화당 외교의 5대 원칙을 제시했다(『부시 행정부의 한반도 리포트』, 김영사, 2001). 일례로 사담 후세인의 책략에 강력하게 대처하겠다는 클린턴의 공언과는 달리 "미온적이고 방어적인 행동이 뒤따랐기 때문에 걸프전 동맹이 해진 누더기 꼴이 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고 썼다.

그러나 놀랄 일도 있으니, 그로부터 정확하게 1년 만에 공화당 정부는 이라크를 폭격함으로써 미온적이고 방어적인 행동 대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의 시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출범 한 달도 안돼 세계에 전한 부시 외교의 첫인사가 폭탄 세례라는 사실도 어처구니없지만, 이렇게 '준비된' 행동들이 군사 폭격 못지 않게 '경제 폭격' 으로 재연되는 사태들이 크게 염려된다.

실제로 그는 "미국의 기업은 미국 군대와 더불어 존경받는 집단으로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고 기염을 토했다.

기업과 군대의 유비도 거북하지만, 미국 기업의 존경과 위엄이 때로는 다른 나라에 가하는 무리한 요구와 엄청난 고통의 산물이라는 점을 함께 깨달으면 좋겠다.

최근 우리 국회에서 전력 산업의 구조 개편과 굴욕 외교 논란이 제기됐다. 정부는 당초 한국전력을 민영화하더라도 국가 경제에 핵심적인 몇몇 사업에 대해서는 외국인 소유를 일정하게 제한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1998년 말 미국 정부는 민영화 개시 단계에 정부 지분 10%만 내국민에게 우선 배정하는 '특례' 외에 외국인에 대한 모든 차별을 폐지하고, 나아가 이런 방식으로 민영화할 기업 명단까지 미국에 제시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국내의 전기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엔론.텍사코.엘파소에너지 등 미국계 기업들이 어떤 식으로 그들의 관심을 표했는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99년 2월 정부는 황급히 외국인 지분 제한을 철회하고 공기업의 해외 매각을 자유화했다. 포항제철.가스공사.한국통신 등 노른자위 공기업이 왕성한 식욕의 외국 자본한테 사냥감이 되고, 그 뒤 민영화는 해외 매각과 등식이 돼버렸다.

졸릭의 말대로 "미국의 민영 부분이 강하고 매력적인 자석" 일지라도, 그것이 외국에 민영화를 강제해 그 기업들을 걸터먹는 불가사리 같다면, 대체 거기 무슨 '존경과 위엄' 이 따르겠는가?

이런 외국인의 '내국민 대우' 이행을 조건으로 한.미 투자협정이 체결될 판이다. 경제력이 다른 두 나라의 투자 협정에는 항상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투자협정에 비하면 내용이나 파장에서 메가톤급 파괴력을 지닌 자유무역협정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졸릭은 지역 협력의 '전략적 어젠다' 로 남미와 아태 지역에서의 자유무역협정을 촉구했다.

그리고 미국 상원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보고서를 올해 9월까지 마련할 예정인데, 부시 행정부가 자유무역 시행의 본때를 보일 첫째 상대로 하필이면 한국을 지목한 사실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 , 2월 27일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멕시코 경제에 횡재냐 재앙이냐는 논란이 무성하지만, 나로서는 한국이 또 하나의 멕시코가 되는 경우만은 결단코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 무역자유화 요구 거셀듯

미국은 북한을 위시한 '불량 국가들' 때문에 국가미사일방위(NMD)체제를 구축한다고 했다. 핵무기는 고사하고 재래식 무기마저 줄이라는 - 짜샤, 탱크가 너무 크고 대포가 너무 많아 따위의 - 통첩 아래 '햇볕' 이 어떻게 쬘지 참으로 걱정이다.

잘들 해보라는 페리 보고서와, 웃기지 말라는 아미티지 보고서 사이에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우리 신세가 그렇게 처량할 수 없다. 게다가 미국 경제의 10년 호황이 끝나간다는 초조감이 있다.

그 돌파구의 하나로 대외 통상 공세는 한층 격해질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NMD 못지 않게 가공할 '경제적 NMD' 를 걱정하게 된다. 어허 군사 미사일은 북으로, 경제 미사일은 남으로 말이지?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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